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던 가족을 떠나 너무도 홀가분했던 20대의 초반은 기억이 안 날정도로 짧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새를 못 참고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올해로 12년째. 첫 2년은 법적 결혼 상태는 아니었고, 이후 10년은 혼인신고 된 상태. 첫 2년은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고, 이후 10년은 남에게 설명하기 쉬운 상태였을 뿐이다.
현 남편인 W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24살의 겨울이었는데, 사실 보자마자 '이 남자와 계속 살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 중 정신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사람이었고, 자기 중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모든 것이 편안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별 고민없이 같이 살기 시작했는데, 그 때만 해도 W도 나도 결혼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2년을 같이 살면서,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술친구로, 영화 친구로, 또 여행 친구로 많은 취미를 함께 했고, 동거인으로서 집안일도, 여러 책임도 함께 나누어 맡았다. 그렇게 살아 본 결과, 계속 같이 살아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종착역이 결혼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베를린으로 유학을 결심하면서부터였다. 유학 예정 기간은 1년 6개월. 6개월은 어학을 할 예정이었고, 1년은 연기 아우스빌둥(Ausbildung: 독일의 직업 훈련과정)으로 연극 학교에 다닐 예정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에 나는 들떠 있었지만, W는 불안해했다. 그렇게 1년 6개월을 떨어져 지내는 짧은 동안 나도 서울에 W를 보러 갔고, W도 베를린으로 나를 보러 왔다. 우린 멀리 있었지만 자주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가까이 있을 때는 발견하지 못한 절절한 사랑도 경험해보았다.
짧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사주를 강력하게 신봉하시는 어머니께서 내가 (엄마가 반대하는) W와 계속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체념하신 듯 시키지도 않은 W와의 궁합을 봐 오셨다. 그 때가 2011년 8월이었는데, 문제는 그 해가 가기 전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내가 마흔이 넘어도 결혼을 못할 거라는 점쟁이의 저주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W를 만나는 것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으셨는데, 갑자기 점쟁이의 말에 혹해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우린 좀 어이없어 했지만,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다가 '결혼 허락'이라는 급변점을 맞이하니 감지덕지,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당시 W는 결혼은 하되, 결혼식은 치르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동안 뿌린 씨앗(?)을 거두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그걸 꺾기엔 우리가 을인 입장이었다.
그 때 들인 돈과 노력을 생각해보면 그동안 미친년이었던 거, 더욱 더 미친척을 해볼 걸 하는 후회가 들지만, 편한 점도 있기는 했다. 역시 남들 다 하는대로 하면, 굳이 긴 설명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잃는 것은 많다. 내가 불편하게 생각해왔던 폐습들에 가랑비에 옷젖듯 스물스물 젖어들어간다. 가부장제, 결혼, 이성애 관계에서 내가 의문을 가져왔던 모든 것에 한 큐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과 함께 나는 백지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난소에 문제가 있어 임신은 힘들 것이라는 (지금 보면 돌팔이) 산부인과 의사의 말만 믿고, 피임을 하지 않아 아무런 계획 없이 결혼 3개월만에 임신까지 하고 말았으니. #엄마, #점쟁이, #돌팔이산부인과의사의 탓이라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들의 합작으로 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은 약 2년동안 역변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