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래퍼에게 보내는 편지

생각하다한국 힙합

비겁한 래퍼에게 보내는 편지

미소년과 함께하는 히카링

도넛맨의 진정한 데뷔

1월 8일, 내가 쓴 트윗에 한 남자가 찾아와 느닷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이름은 ‘도넛맨’으로, 소위 힙합을 하는 래퍼였다. 내가 작성한 그 트윗은 수천 번 가량 리트윗이 되며 확산되고 있었는데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넛맨의 도발이 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전략적 행위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트윗 타래 밑에 그는 여성혐오, 장애인 비하를 하는 멘션을 달았고 결국 욕을 한 바가지로 먹었다.

며칠 뒤 도넛맨은 엉뚱하게도, 나와 설전을 벌였던 트위터가 아닌 인스타그램에다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문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작성했다. 그는 자신이 했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특정 집단에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지만” “서로 싸우고 갈라지게 하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합니다”라고. “이상한 말들로 서로를 혐오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싫었다”면서.

아무도 그가 누군지 몰랐기에 그저 지나가는 한국 남자겠거니 생각했는데, 힙합을 하는 사람이라 하니 어쩐지 수긍이 갔다. 리스펙트(respect)를 외치는 국힙이 그간 보여준 여성에 대한 수많은 디스리스펙트(disrespect)가 떠올랐고. 어찌 보자면 1월 8일은 그 전까지 도넛맨을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넛맨이 데뷔한 날이나 마찬가지일텐데, 안타깝게도 그는 11일 쌩뚱맞은 사과문을 들이밀고 잠적해 버렸다. 이 글은 1월 8일부터 11일 까지 내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글이다.

힙합 정신과 여성혐오의 상관관계

첫 멘션 이후 그는 내게 욕설을 더 했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항의했다. 도넛맨은 그 항의에 일일히 멘션을 하더니 마치 최후의 선언처럼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너무 화내지 말고 우리음악듣지마 가서 아이돌그룹 상품들이나 많이사줘”.

그는 아이돌에 대한 편견, 여성은 힙합을 좋아하지 않을 거란 편견, 동시에 힙합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그 짧은 문장 안에 담아 내며 여성을 후려쳤고 이 문장은 결국 그가 추구하는 힙합 정신과 여성혐오의 상관관계를 증명하는 훌륭한 레퍼런스가 됐다. 만약 그가 나에게 욕설을 한 뒤 다른 이들에게 더 멘션하지 않고 적당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이 모든 것이 그저 헤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를 몰랐으니까.

‘우리 대신 여혐해줘서 고마워’

도넛맨의 욕설 덕분인지 용기있는 몇명의 남성이 내게 멘션을 날렸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저급하고 구시대적이라 별 재미는 없었으며, 그마저도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여성=메갈’이라는 공식에 대입하는 흔한 패턴이었다. 하지만 이 점에서 흥미로운 모습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일베용어를 쓰면서 욕하는 남성, 나의 글에 ‘남혐’과 ‘일반화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무턱대고 욕설을 다는 남성, 헛소리를 하는 남성들이 있었다. 

둘째, 도넛맨을 ‘메갈’과 싸운 (평범한)남성으로 상정하면서 그를 응원하는 남성들이다.

페이스북 및 기타 SNS에서는 “도넛맨 메갈 저격”, “도넛맨과 메갈의 싸움” 등의 용어를 통해 도넛맨을 응원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그마져도 인기가 없던 것 같지만.) 도넛맨을 응원한 남성들은 그를 응원하거나 여성혐오발언을 덧붙였고, 자신이 가진 여성혐오를 도넛맨이 오롯이 드러내주길 바랬다. 그들은 위기에 빠진 도넛맨을 응원하는 댓글을 남김으로 하여금 도넛맨에게 마음대로 대리인의 역할을 부여했다. 여성혐오를 하고 싶지만 차마 직접 그럴 용기는 없는 자신들의 대리인 말이다.

(감히) 입을 열어 말한 남성들의 공통점은 본인을 어떤 평범한 남성으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도넛맨 또한 사과문에서 본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어느 특정한 집단에도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들은 정말 신경도 안쓰고 문제없거든요”라면서.

하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글에 대해 “못생긴 너를 아무도 널 안 만진다”라는 말, 여성의 경험과 고통에 대해 닥치라고 하는 말, 욕설로 상대를 겁주는 말들, 예민하게 굴지말라는 말들. 이것은 여성혐오적인 말이 아닌가? 그리고 이에 옹호하고 응원한다는 것은 여성혐오자가 아닌가?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도넛맨의 말에 동의하고 응원하는 것은 여성혐오에 동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러한 동의들은 여성혐오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같다. 여기서 소위 평범한 남성들의 평범성에 대한 인식은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악의 평범성’이다.

갈 곳 잃은 사과

항의가 거세지자 도넛맨은 11일 인스타그램에 사과문을 올렸다. 이 사과문에는 목적어가 없기에 언뜻 보면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과문에는 명확한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은 갑자기 그의 욕을 들어야 했던 나도 아니고, 도넛맨이 ‘아이돌 음악이나 들으라’며 후려친 수많은 아이돌과 그의 팬들도 아니며, 그가 손쉽게 비하한 여성들과 장애인도 아니었다.

그가 사과한 대상은 ‘도넛맨의 팬이었으나 이번 일로 자신을 조금 나쁘게 생각할지도 모를 사람들’이다. ‘앞으로 자신의 음악을 좋아 할지도 모를 미래의 누군가’다. 후일 이 사건을 통해 욕을 먹을지도 모를 자신을 위한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넛맨은 이 해프닝이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말하면서도 그 뒤에 이어 바로 “반성하면서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음악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뻔뻔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넛맨은 참 비열하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허공에 대고 사과를 했다. 사과했지만 사과하지 않은 애매한 상태를 만들었다. 많은 가해자들이 늘 그랬듯, 그는 이미 사과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도넛맨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나를 ‘서로를 혐오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이라 지칭해 놓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난장판에서 혼자 황급히 퇴장하려 하고 있다. 문제는 트위터에서 일으켜 놓고, 사과는 인스타그램에 했다. 반쪽짜리 사과문에 비난이 일자 사과문을 올린 인스타그램 계정을 황급히 비공개로 설정했다. 사과를 받아야 할 나도 그의 사과문을 캡쳐본으로나마 가까스로 볼 수 있었다.

정말 사과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왜 인스타를 비공개로 설정했는가? 그는 왜 트위터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왜 당사자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가? 그는 누구를 위한 사과를 하는가? 그렇다면 사과를 왜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하나,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과한 것이다.

나는 도넛맨의 저열한 행동에 왜 이렇게 분노하는가?

어쩌면, 나는 재치있게 이 상황을 그냥 넘겨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성혐오적 악플과 싸운 이야기는 그저 매일 벌어지는 소소한 해프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여성에 대한 글을 쓰면 그 아래엔 꼭 여성혐오적인 댓글이 달린다. 그것은 일상이다. 그래서 나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쓸 때 은연중에 약간 주저하거나 자기검열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 도넛맨의 헛발질과 헛사과에 더 화가 났다.

그의 되도 않는 사과문을 읽다가 문득 ‘어쨌든 그 사람이 사과 비슷한 무언가를 올렸으니 그냥 이쯤 하고 넘어 가는 게 좋은걸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고 이게 나를 한층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사과 비슷한 무언가를 받은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했던 과거와, 그 기계적인 사과를 위해 버텨왔던 지루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사과문이 올라온 당일 기고를 할까 말까 하던 찰나에 누군가 이런 멘션을 보냈고, 꼭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케 했다. 

예전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내가 화를 낼 때, 나는 나뿐만 아니라 미래의 여자아이들을 위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이전에 화를 냈던 여자들 덕에 숨막혀 죽지 않고 이제까지 살았다” 라는 글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나를 응원하고, 함께 분노해 주는 여성들을 보았다. 그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트위터에서 여성혐오에 대해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여성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면 그와 함께 맞서 싸울 것이다. 이 경험을 순간적인 분노 혹은 개인적 경험으로 소진하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그리고 도넛맨은 보아라.

비열한 도넛맨에게 줄 리스펙트는 없다.

도넛맨은 나에게 사과하라.

‘병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장애인을 혐오한 것을 사과하라.

아이돌팬과 여성들에게 사과하라.

너의 경솔함으로 인해 전보다 더 쉽게 알량하게 입을 놀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 역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리고 닥쳐라.

추신: 도넛맨...당신은 너무 희미한 존재라 재빠르게 원고를 써버린 나와 페미니즘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 며칠 뒤면 당신의 이름은 잊혀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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