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우리나라 아직 살만하잖아. 나는 성소수자여서 받은 차별은 별로 없다고 생각해. 몇 년 전 내 입에서 나왔던 대사였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삽화처럼 선명하다. 내가 평소처럼 술자리에서 내 지론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아니 솔직히 혐오하면 뭐? 마음대로 하라 그래. 누가 뭐래도 상처 안 받으면 그만 아니야? 그냥 개가 짖는구나 하고 넘기면 되잖아. 내가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 너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잖아. 근데 다들 너 같지는 않아. 안 괜찮은 사람도 있어.” “야. 내가 레즈비언이라서 내가 괜찮다는데 너희가 뭘 아냐? 그거야말로 동성애자 다 불쌍하게 보는 거 아니야?” “아니, 나는 알아. 내가 성소...
[서울/25] 신촌에서 맥주 한잔해요. 머짧 두 명, 일스 한 명 있어요. 맥주 마시기 부담스러운 외모는 아님. 그대들도 그랬으면. [경기/17] 키 150대 마르고 애교 많은 긴머리 일스 데려갈 예쁜 언니 없나? 빠른 오프, 사심 환영. 내적 외적 괜찮으면 동갑, 연하도 ok [부산/31] 주말 쉬는 직장인. 부담스럽지 않게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요. 영화, 여행, 운동 좋아해요. 꾸밀 줄 아는 한글자 분들 연락 주세요. 레즈비언 전용 메신저에 등장할 법한 쪽지들이다. 내가 지금 가상으로 구성해본 것이지만, 이 메신저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쪽지를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애인이나 친구를 찾는 레즈비언들은 구구절절 외모와 성격을 명시한다. 이 메신저는 글자수의 제한이 있는 짧은 쪽지 위주의 공간이라 이 정도에서 끝나지만, 이전에 웹사이트를 이용하던 시절엔 더욱 세세하게 원하는 이상형의 조건을 한 페이지씩 늘어놓는 경우도 많이 봤다. 자기소개와 선호하는 상대에 관한 예시에는 ‘숏컷’, ‘긴 머리’, ‘단발’과 같은 머리 길이에 관한 언급이 빈번하게 들어간다. 그 외에도 화장을 하는지, 하이힐을 신는지, 옷을 캐주얼 하게 입는지 등 외모...
‘동성애 과연 타고나는 것일까?’ 표지에 예쁜 무지개가 그려진, 유명한 호모포비아 교수의 책 제목이다. 물론 저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질문의 의도가 불순하다. 타고나는 것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질병도 아니고 고칠 것도 아닌데 선천인지 후천인지 따져서 뭐할까 싶지만, 나 또한 스스로 참 많이도 던졌던 질문이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홉 살에 걸그룹 핑클을 좋아하면서 그랬나? 일곱 살 때 유치원의 여자 반장이었던 나리를 좋아했는데, 더 이전에 여섯 살 때는 짝꿍이었던 혜미를 좋아했고, 아니 혜미를 알기도 전에 TV 애니메이션 뾰로롱 꼬마 마녀의 민트를 그렇...
결국,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릴 때 읽은 동화는 모두 그렇게 끝났다. 나중에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던 신데렐라는 파티에서 왕자님을 만나 팔자를 폈고, 독이 든 사과를 먹은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로 목숨을 구한다. 아, 인어공주는 이웃 나라 왕자님을 사랑하다 물거품이 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녀들에게는 모두 왕자님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교롭게도 다들 이성애자였나보다. 동화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모두 남자를 사랑했다. 노래 가사에서도 애니메이션에서도 소설에서도 심지어 학교...
어때? 좋아? 좋았다. 섹스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좋았다. 온전히 나만 바라보는 그 순간이 좋았다. 언제나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라서 나에겐 그 순간이 매우 소중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응, 좋아. 너무 좋아. 나는 섹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는 운동이 일상이고 취미일 수 있지만 나는 좀 부담스럽다. 집이 아닌 곳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씻는 게 불편하고, 함께하는 거면 사회성을 발휘하기가 피곤하고, 혼자 하는 거여도 땀이 나서 찝찝한 기분이 가뿐함을 압도한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무섭고 다음 날 더 피곤해지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운동을...
헤어지자고 한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끝까지 무덤덤한 모습이 또 한 번 원망스러웠다. 다정했던 순간의 산산조각들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칼날처럼 예리해서 살점이라도 베일 것 같았고, 함께 만든 기억에 혼자만 소스라치는 것도 비참했다. 도망치듯 집에 돌아와 내리 다섯 시간을 울었다. 생각해보니 이건 슬픔이 아니었다. 술을 진탕 먹은 다음 날, 닭갈비를 먹다 얹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명치에 뭐가 걸린 것처럼 갑갑했다. 그래, 메스꺼움이었다. 내 지난날이 불쌍해서 토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로부터 빼내어 분리하고 싶었다. 뺨을 한 대 치고도 싶었다. 그렇게 자기연민과 비난과 분노와 상...
결혼은 안 할거에요? 직장 동료가 묻는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 복잡한 거짓말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런 거 관심 없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자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한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꿈꾸는 표정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너는 그런 거 관심 없잖아. 친구들은 내가 결혼을 별로 안 하고 싶은 줄 안다. 젊은 날의 내가 ‘사랑은 이데올로기고 연애는 성역할 수행’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던 게 기억에 남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예전엔 정말 결혼을 꿈꾸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삶이 좋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는 게 즐거웠다. 우리 엄마도, 엄마...
“친구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이 시간에요? 친한 친군가 봐요.” 친한 친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인생의 동반자 관계를 약속한 친한 친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동료는 그 뒤로도 계속 의아해했다. 막차가 끊길 시간에 두 시간도 넘는 거리를 간다는 게 잘 이해가 안 됐나 보다. 우리 관계를 모르는 애인 가족 측에서도 자정에 굳이 내가 오는 걸 부담스러워했을지 모른다. 배배 꼬인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성 커플이었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였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애인이 할머니와 각별한 사이였던 건 아니었지만, 꼭 고인과의 이별로 인한 감정적 괴로움 이외에도 그런 자리의 어려움은...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했다. 이민에 반대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의 테러였다. 50명이 사망했고 또 50명이 다쳤다. 테러범은 이슬람 사원을 공격했고, 많은 무슬림 교도들이 희생됐다. 같은 날, 내가 지내던 오클랜드에서도 폭발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됐다.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기사를 봤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다음 날 시내에 나가니 평소와 달리 이상할 만큼 백인들밖에 안 보였다. 주차장에서 깨진 유리창을 보고 덜컥 겁이 났고, 길에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백인 남성이 무서웠다. 그날 외출을 하기 전에 수없이 고민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일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나오자...
11시 55분, 교과서를 덮고 오른발을 책상 밖으로 미리 뻗는다. 5분 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기 위해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날도 급식실에 일등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그날의 점심시간은 유독 초조했다. 제일 먼저 밥을 받아놓고도 먹는 둥 마는 둥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친구들은 어디 아픈 건 아니냐며 나를 걱정했다. 그 다정함이 새삼스럽게도 소중해서 괜히 슬퍼졌다. 조금 뒤에도 너희는 여전히 나에게 다정할까?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모두 한순간에 나를 경멸하게 될까 봐 친구를 잃어버릴까 봐 겁났다. 동성애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우리와 관련 없는 사람들 얘기였...
최근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에게서 예전에는 학생들이 젠더 위계 질서를 말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면 요즘은 젠더 위계 질서보다 젠더 다양성을 말하는 것에 관심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트랜스젠더퀴어 혹은 젠더 다양성을 주장하는 일련의 흐름으로 인해 여성과 남성 사이에 발생하는 불균형한 차별, 젠더 위계 질서를 말하기 어려워졌다는 식의 주장은 꽤나 널리 퍼져 있다. 이 주장은 젠더 위계 질서를 다루는 논의와 젠더 다양성 논의는 서로 모순되거나 배척한다는 이해를 전제한다....
성소수자 운동에서 동성애가 아닌 다른 성소수자 관련 범주로 활동하는 활동가에게 정체성 범주의 가시화는 매우 중요한 의제다. 이성애를 자연 질서로 여기는 사회에서 비이성애 실천이나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한 다양한 범주는 모두 특이하고 이상한 행위거나 ‘동성애’로 인식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가시화 운동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이성애-비트랜스가 아니라고 말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려는 작업이기도 하다. 트랜스가 정신 이상 및 이상 성욕과 관련 있는 변태 행위고, 무성애는 미성숙하고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생긴 현상/착각이며, 바이섹슈얼은 문란하고 자신을 동성애자로 인정할 용기가 없어 변명하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