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을 그만두다 下

핀치 타래코르셋페미니즘탈코르셋

'하이힐'을 그만두다 下

그만두다 시리즈 (1)

수민

무릎에서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는줄 처음 알았어

“지지직” 그 소리는 흡사 수건이나 붕대 같은 천을 잡고 찢는 소리 같았다. 옆에 있던 사람이 듣지는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소리가 컸다. 버스 계단에서 보도 블록위로 내려와 한두걸음 걸어보는데, 소리가 난 왼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다행히 못 걸을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그대로 걸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와 힐을 벗고 평소처럼 생활하다보니 무릎의 통증은 점점 사그라들었지만, 워낙 요란한 소리가 났기에 걱정이 되어서 며칠 후 정형외과에 가봤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엑스레이를 찍어봤다. 그런데 나와 의사선생님이 함께 걱정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멀쩡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머쓱. 그럼 그 통증은 무엇이었나 하고 조금 의문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무릎이 무사하다니 다행인 일이었다.  

문제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한 번 데인 이후로 다시 똑같은 힐을 신고 걸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다시금 관절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걸 듣고 싶진 않으니. 결국 그해 겨울을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던 부티힐은 상자에 넣어져 신발장 맨윗칸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약 5년이 흘렀다.  



하이힐 벗는 게 제일 쉬웠어요

나는 탈코르셋을 해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란 물음엔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좀처럼 하기가 힘들다”라고 답하곤 한다. 가부장제의 구조를 효과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내가 가부장제의 한 켠에 발붙이고 살고 있는 만큼 코르셋을 전부 벗어버리기가 힘들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종류의 코르셋을 벗고자 노력한다. 

그중에서 하이힐은 내가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코르셋이었다. 매일 구두를 신고 출근해야만 하는 직업이 아니었기에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당장 감수해야 할 불이익도 없었으며, 인간으로서 제대로 걷고 뛰는 일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 신발이라는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신발을 신는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나는 그게 결코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는 답할 수 없었다. 왜 자진해서 높은 굽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무릎 관절을 담보로 잡고 걸어다녔는지. 그 답을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 나는 무서워서 하이힐을 신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 하이힐을 신지 ‘않기로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시리즈는 그렇게 하나하나씩 코르셋을 벗어나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하이힐을 벗는 건 지금까지 문제없이 대성공을 유지해오고 있지만, 종종 그렇지 못한 종류의 코르셋들도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관성’ 때문일 때도 있었고, 이것이 진짜 코르셋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일 때도 있었다. 앞으로 하나씩 그 과정—아직도 현재진행중인—을 이야기해나가려 한다.

SERIES

그만두다

수민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오늘도 결국 살아냈다 1

매일매일 사라지고 싶은 사람의 기록

차오름

#심리 #우울
하필 이 시기에 고3으로 태어난 나는 , 우울증과 공황발작으로 많이 불안해진 나는, 대견하게도 오늘 하루도 잘 버텨냈다. 우울증과 공황발작이 시작된 건 중3. 하지만 부모는 어떤 말을 해도 정신과는 데려가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20살이 되고 알바를 하면 첫 번째로 갈 장소를 정신과로 정한 이유이다. 부디 그때가 되면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지면서. 부모는 우울증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병원이 다녀왔다

..

낙타

정신병원과 한의원에 다녀왔다 이번엔 둘다 끝까지 치료하고 싶다.....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