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똑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
이 말이 왜 가장 무서운 말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다. 이런 악담을 엄마가 나에게 하다니. 엄마가 정말 내게 화가 많이 났구나 하는 것은 둘째치고, 엄마가 정말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소중한 사람이 이 제도와 사회를 통해 망가지는, 억압당하는, 희생되는 꼴을 지켜보렴—이라는 말로 바꾸어 들렸던 것일까. 엄마가 던진 그 한 마디의 무서움은 엄마와 나, 그리고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르는 나의 딸로 이어지는 ‘여자’로서의 삶의 대물림에 있었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그러한 삶을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고스란히 지켜봐야 한다는 저주이기도 했다.
본인도 이 말이 너무 싫었다던 엄마가 처음 내게 이 말을 했을 때, 내가 느낀 불안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뭔가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달까. 나는 평소에 정확히 그게 뭔지 설명할 수는 없었어도 이 사회 내에서 살아가며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던,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내 삶에 들어와있는 몇몇 요소들을 나의 세대를 마지막으로 끊어내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이런 말을 하다니. 이건 정말 듣는 사람에게 최고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악담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이 말이 별로 무섭지가 않다. 나는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했고, 그러한 결심 이래 이때까지의 추이로 보면 나의 계획은 대성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 사회에서 나와 똑같은 딸을 낳을 일이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조금 후련하다. 이제 저 악담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당시 엄마로부터 몇번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그리고 그 선택지를 고르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온, 그것도 나름 똑똑한(!) 아이였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중에 내 마음 속에서는 삶의 ‘기본 세팅’이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는 것에 맞춰져있었나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결혼과 출산이 내 삶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었기에 저 말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금 우습다. 겨우 15살짜리 애가, 그새 사회적인 관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자기 삶의 일부로 체화했다. 사회로부터 당연함을 학습하는 게 이렇게나 무섭다. 그 당연함에서 벗어나는 건 이렇게 쉬운데, 벗어나도 된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당연함에서 비껴나기로 결정함으로써 내게는 두려운 말이 하나 줄었다. 두려움을 주지 못하는 악담은 더이상 악담으로서의 쓸모가 없는 법이다. 딸이 비혼과 비출산에 전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 엄마는 예의 악담을 이제 더이상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