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그리고 '여자력'에 대한 고찰

핀치 타래언어코르셋일본

일본어 그리고 '여자력'에 대한 고찰

성별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나뉜다면

수민


"속눈썹 연장을 받다니 여자력이 높다"는 칭찬(?)을 받고 '사실은 아침에 화장하기 귀찮아서 시술 받은 거라  오히려 여자력이 낮은 거'라고 몰래 생각하는 장면 (출처: Googirl)
"속눈썹 연장을 받다니 여자력이 높다"는 칭찬(?)을 받고 '사실은 아침에 화장하기 귀찮아서 시술 받은 거라 오히려 여자력이 낮은 거'라고 몰래 생각하는 장면 (출처: Googirl)


여자력’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일본 방송을 자주 보거나 일본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아마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여성스러운 면모를 많이 갖추고 있으면 있을수록 한 사람의 여자력은 올라간다. 요리를 잘하면 여자력이 높고, 메이크업과 헤어에 신경쓰지 않으면 여자력이 떨어지는 거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임은 물론이고, 여자력을 업시켜줄 수 있는 앱들의 목록이 선정되어 소개되거나 내 여자력은 어느정도 되는지 진단하는 테스트가 유행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찌보면 일본어라는 언어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도 든다.

여성의 경험을 말하기 위해선 먼저 여성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생각은 반드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내용물을 담을 틀이 이미 특정한 모양으로 굳어있다면 담고자 하는 내용물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 생각과 언어 간의 이처럼 긴밀한 관계 덕분에,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갖는 생각이 특정한 모양으로 자리잡히기도 한다. 일본어의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다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특정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특정한 언어로 바꾸어 말한다는 것 이상이다. 오히려 내가 특정한 언어로 말할 때, 나는 특정한 인격이 된다고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나와,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나, 그리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나. 사용하는 언어가 바뀔 때마다 목소리와 발성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말을 할 때와 표정과 태도도 달라진다. 내 생각을 담는 그릇의 모양이 바뀌니 그릇이 바뀔 때마다 내 자아가 조금씩 바뀌는 느낌이다.  


여자력이 낮은 모습의 대표인 맨얼굴에 안경과 마스크.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화장을 안한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출처: Googirl)
여자력이 낮은 모습의 대표인 맨얼굴에 안경과 마스크.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화장을 안한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출처: Googirl)


일본어의 경우 남성이 사용하는 언어과 여성이 사용하는 언어가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 똑같이 ‘거부’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할 때도 남성에게만 허락된 표현이 있고, 여성이 써야하는 표현이 있다. 남성이 쓰는 표현을 여성이 쓰게 되면 그건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겨진다. 여자애들은 그런 말씨를 쓰는 게 아니라며 지적을 받는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남성이 무언가를 거부할 때 쓰는 표현이 여성이 무언가를 거부할 때 쓰는 표현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거칠다. 한국어로 치면 “하지마”는 남성이, “하지 말아줘”를 여성이 쓰는 식이다. 애초에 내가 내뱉어야 하는 말이 “하지 말아줘”인데 목소리의 톤만 “하지마”와 똑같이 맞춘다면 뭔가 어색할 것이다. 자연스레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와 태도로 “하지 말아줘”를 말하게 된다.  

사용자에게 특정한 태도가 요구되는 언어를 평생 사용하게 된다면, 그 언어에 맞추어 가치관 또한 특정한 모양으로 자리잡힌다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자라는 성별로 태어나 여자말을 사용하고, 그 결과 ‘여성스러운’ 여성이 되고자 의식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내게 허락된 언어, 그 밖으로 나가서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일본에서 ‘여자력’이란 단어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없어지지 않을까 하고 조금 슬픈 예상을 해본다.

수민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보장 중에 보장, 내 자리 보장!

이운

#방송 #여성
나는 땡땡이다. 아마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시간을 올인하고 있는 5천만 결정장애 국민들을 위한 해결 상담소로,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여 해결해 준다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방송이다. 그리고 ‘땡땡이’는 이 취지에 맞게, 사연자의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다 만들어진 애칭이다. 비밀보장 73회에서..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