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력’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일본 방송을 자주 보거나 일본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아마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여성스러운 면모를 많이 갖추고 있으면 있을수록 한 사람의 여자력은 올라간다. 요리를 잘하면 여자력이 높고, 메이크업과 헤어에 신경쓰지 않으면 여자력이 떨어지는 거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임은 물론이고, 여자력을 업시켜줄 수 있는 앱들의 목록이 선정되어 소개되거나 내 여자력은 어느정도 되는지 진단하는 테스트가 유행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찌보면 일본어라는 언어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도 든다.
여성의 경험을 말하기 위해선 먼저 여성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생각은 반드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내용물을 담을 틀이 이미 특정한 모양으로 굳어있다면 담고자 하는 내용물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 생각과 언어 간의 이처럼 긴밀한 관계 덕분에,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갖는 생각이 특정한 모양으로 자리잡히기도 한다. 일본어의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다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특정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특정한 언어로 바꾸어 말한다는 것 이상이다. 오히려 내가 특정한 언어로 말할 때, 나는 특정한 인격이 된다고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나와,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나, 그리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나. 사용하는 언어가 바뀔 때마다 목소리와 발성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말을 할 때와 표정과 태도도 달라진다. 내 생각을 담는 그릇의 모양이 바뀌니 그릇이 바뀔 때마다 내 자아가 조금씩 바뀌는 느낌이다.
일본어의 경우 남성이 사용하는 언어과 여성이 사용하는 언어가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 똑같이 ‘거부’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할 때도 남성에게만 허락된 표현이 있고, 여성이 써야하는 표현이 있다. 남성이 쓰는 표현을 여성이 쓰게 되면 그건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겨진다. 여자애들은 그런 말씨를 쓰는 게 아니라며 지적을 받는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남성이 무언가를 거부할 때 쓰는 표현이 여성이 무언가를 거부할 때 쓰는 표현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거칠다. 한국어로 치면 “하지마”는 남성이, “하지 말아줘”를 여성이 쓰는 식이다. 애초에 내가 내뱉어야 하는 말이 “하지 말아줘”인데 목소리의 톤만 “하지마”와 똑같이 맞춘다면 뭔가 어색할 것이다. 자연스레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와 태도로 “하지 말아줘”를 말하게 된다.
사용자에게 특정한 태도가 요구되는 언어를 평생 사용하게 된다면, 그 언어에 맞추어 가치관 또한 특정한 모양으로 자리잡힌다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자라는 성별로 태어나 여자말을 사용하고, 그 결과 ‘여성스러운’ 여성이 되고자 의식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내게 허락된 언어, 그 밖으로 나가서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일본에서 ‘여자력’이란 단어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없어지지 않을까 하고 조금 슬픈 예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