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방울방울은 커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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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방울방울은 커녕

다시보니 대환장파티인 추억의 작품들

수민

지난 해 ‘탑골공원 인기가요’가 유행했던 탓이었을까. 문득 어렸을 때 봤던 만화영화들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은비까비>, <동화나라 ABC>, <배추도사 무도사>와 같은 90년대의 ‘K-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내 친구 아서>, <거북이 프랭클린> 같은 해외 프로그램까지.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었다.  

꼭 봐야지 했던 목록 중에는 <영심이>도 있었다. 사실 <영심이>는 내가 어린이일 때 방송이 시작한 것은 아니어서, 나보다 앞선 세대가 즐겨봤던 것을 재방영해준 것이었다. 어렸을 때 이모집에 놀러가면 이모 책장에 꽂혀있던 영심이 소설판을 즐겨봤던 미취학아동 시절의 나. 티비 애니메이션도 꽤나 즐겨봤을 것이다. 영심이네가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로 시작하는 챈트를 부르던 장면이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왠지 성우의 목소리부터 80년대 느낌이 잔뜩 나는 주제곡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심이>의 첫화가 시작되는 순간. 잔뜩 옛생각에 신이 나서 화면을 보고있는데, 뭔가 이상하다. 전혀 재미있지가 않다. 유치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 별로 유치하진 않다. 다만 기분이 나쁘다. 불쾌하다. 이거 너무 빻았다.  

= 영심이를 감상하던 내 표정
= 영심이를 감상하던 내 표정

영심이가 싫다는데 “너는 장차 내 색시가 되어야 한다”며 줄기차게 영심이를 쫓아다니는 경태도 이제와서 보니 소름이 끼친다. 영심이의 엄마가 타주는 커피를 받아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게 영심이 엄마에게 외투를 던지듯 건네는 영심이 아빠가 싫다. 돈이 없어 뒷굽 닳은 구두를 신고 있다는 영심이 엄마의 타박에 “본인 몸무게를 줄여볼 생각을 하라”는 소리를 늘어놓고, 자존심 건드리지 말라며 집안 물건을 내던지는 시늉을 하는 영심이 아빠의 모습이 나왔을 때는 기함을 했다. 게다가 왜 영심이 오빠가 먹을 음식을 오빠가 직접 가져가는 게 아니라 영심이가 갖다바쳐야하는지.   


그 시절 추억의 만화를 다시 보니 빻은 사상을 어린이용 만화에 얼마나 가득 담아놨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즐거움은 커녕 불편함만 가득. 아름답게만 보였던 내 추억을 꺼내 새로운—그러나 불편한—감상으로 먹칠해버리는 느낌도 들어 괜히 다시봤나 하는 아쉬움도 느껴졌다.

한국 만화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피터팬> 얘기다. 물론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에 아주 큰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긴 어렵겠지만 (피터팬은 50년대 작품이고 영심이는 80년대 작품이다).  

그 입 닥쳐, 피터
그 입 닥쳐, 피터

듣기만 해도 마음이 누그러지는 오프닝송 'The Second Star to the Right'과는 대조적으로, 피터팬은 웬디 앞에서 왜이렇게 빻은 소리만 해대는 건지. “Girls talk too much.” 그 입 닥쳐, 피터. 작품 내의 여성 캐릭터들 즉 인어들과 웬디, 그리고 팅커벨과 웬디 사이에 적대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꼴보기 싫었다. 새로운 ‘피터팬의 여자’인 웬디를 경계하고 질투하며 못살게 구는 기존의 피터팬의 여자들. 전형적인 ‘여적여’ 구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 지금 내가 사는 일상에서만 불편함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추억까지도 색을 다시 입게 된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커녕, 영롱할 줄 알고 불었던 비눗방울이 죄다 펑펑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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