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드소마>에 대한 미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 전, 호러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아리 아스터 감독의 <미드소마>를 보러 갔다. 나는 호러의 장르적 특성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무서운 것은 참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예고편도 줄거리도 찾아보지 않은 채, 영화의 배경이 스웨덴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갔다. 그런데 <미드소마>의 진정한 공포는 스웨덴의 호르가에서 펼쳐지는 집단 광기나 의문스러운 살인이 아니라 대학원생 뼈 때리기에 있었다. 주인공 대니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인류학과 대학원생이다. 그는 졸업 논문의 주제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한다. 대니와 크리스티안은 스웨덴의 호르가를 연구하는 친구 조쉬를 따라...
그래, 방금 A가 중요한 지적을 했지. 백인여자교수 S가 말했다. 마치 고요한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아주 잠시 교실의 시간이 멈추었다. 방금 중요한 지적을 한 것은 A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숨을 죽인 사이, 구식 창문형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교실을 채웠다. 누가 얘기 할래? 서로 눈치만 살피는 사이, 호명된 A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숙희가 얘기한 거야....
한국 대학에서 영문과 학부생이던 시절,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 중에 “고급영어글쓰기 1”과 “고급영어글쓰기2”가 있었다. 나는 성적을 후하게 주기로 소문 난 외국인 교수의 수업을 들었는데, 그는 우리 과에서 “머리 숱 많은 주드 로”로 알려진 유명인이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첫 수업을 듣던 날 주드 로 2.0을 보고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그가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학계의 위계 질서나 풍토에 무지했던 나는 주드 로 2.0이 너무 똑똑해서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도 받고 교수 임용도 (왜인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받은 줄로만 알았다. 지금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주드 로 2.0은 아마 대학원생이었을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
지금은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학교에 대한 욕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이런 내게도 학교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보스턴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나는 상상에 부풀어 있었다. 눈 내리는 뉴잉글랜드의 겨울, 머그에 든 커피를 마시며 벽난로 옆에서 논문 쓰기(벽난로는 커녕 거실도 없는 집에서 살았다), 지도교수님과 학회에서 패널 발표 하기(지도교수님이 학교를 떠났다), 동기들과 캠퍼스 잔디 밭에서 책 읽기(혼자 읽었다) 등. 대학원생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마는, 그래도 나름대로 장밋빛 인생을 꿈꿨다. 어쨌거나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 중 하나에 붙었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내가 찾던 완벽한 학교였다. 사립학교라...
Native. [형용사] (사람이) 태어난 곳의; 토박이의 (오래 산). 대학원 유학이 결정되어 주위에 소식을 알렸을 때, 내가 가장 자주 들었던 얘기다.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이 있으니 너는 걱정 없겠다고. 비자 문제 때문에 체류 기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미국을 오갈 때 마다 악명높은 출입국심사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것, 캠퍼스 밖에서도 일을 구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적어도 법적으로는 내가 이 나라에 대한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은 분명 크나큰 행운이고 특권이다. 너는 네이티브(native speaker)라 걱정 없겠다. Native speaker. [명사] 모국어 사용자; (특정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 네이티브면 걱정 없을까 너는 네이티브(native)라 걱정 없겠다. 이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 즉 원어민이라 악센트나 문법적 오류 없이 영어를 하니 문제 없으리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학교엔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다른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영문과 대학원생은 전공 특성상 영문 텍스트의 질적 연구를 할 뿐만 아니라, 연구 논문이나 저서의 문학적 질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는 규칙은 아니지만, 유려하고 세련된 글을 선호하는 엘리트주의적인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있기 때문이다. 뻔한 얘기지만, 영어가 모국어이면 유리한 학문이다. 게다가 대부분 영문...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과정 3년차가 되면 보통 구술 시험을 본다. 학교마다 시기나 방법은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텍스트를 20권 전후로 추려 목록을 몇 개 구성한 뒤 한 학기 내내 공부를 한다. 그 내용으로 학기 말에 2시간 정도 교수 세 명과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이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논문 계획서 (prospectus)를 쓰고 논문 쓰기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논문을 쓰기에 앞서 그 동안 들었던 수업과 자신의 연구를 체화하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시험이기에, 많은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목록의 내용이나 구술 시험에 들어가는 교수 위원회를 구성할 자유를 준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16세기 문학의 제국...
“네가 정식으로 L의 수업을 듣는 건 불가능해.” E는 딱 잘라 말했다. 내가 그 학기 개설된 L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유일한 방법은 학점을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고 청강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세미나 두 개를 들을 예정이었고, 학부 수업 조교 일에 더해 매주 최대 10-12시간씩 학교의 라이팅 센터에서 튜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점 인정조차 받지 못할 수업량을 늘린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대신, 나는 그 다음 학기에 L과 독립 연구(independent study)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A와 함께. 독립 연구는 말 그대로 교수와 대학원생이 과에서 제공되는 커리큘럼과는 별개의,...
요즘 내 책상 위에는 늘 한 권의 소설이 있다. 2015년에 출판 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패트리샤 팍(Patricia Park)의 소설 <리 제인(Re Jane)>이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 중 하나 <제인 에어>를 21세기 뉴욕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영국인 고아 소녀였다면, 패트리샤 팍의 제인 리는 한국계 미국인 고아 소녀다. <제인 에어>에서 제인이 사랑한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그의 숨겨진 아내,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은 브루클린에 사는 힙스터 부부로 새로이 상상된다. 패트리샤 팍의 세계에서 21세기의 로체스터는 박사 논문을 끝내지 못한 대...
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뒤 끊임없이 겪었던 크고 작은 인종차별에 불구하고 시간이 멈추는 일은 없어, 눈 떠 보니 2년이 지나 있었다. 네 학기가 지나는 동안 나는 수업 11개를 들었으며, 학회 세 개에서 발표를 했다. 대학원 밖의 삶도 단단하고 풍성해졌다. 이사를 한 번 했고, 연애를 두 번 끝냈으며, 요가 지도자 과정을 수료했다. 사이사이에 보스턴이 힘들다는 핑계로 한국에 자주 갔고, 십 년 넘게 알아온 가까운 친구들이 두 명이나 놀러 왔다. 음식은 여전히 맛이 없고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이 옅어지는 일도 없어, 그럭저럭 보스턴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2018년 9월, 가을학기가 시작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