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얼굴도 잘 모른채로 누군가와 만났다. 더운 여름의 시작이었고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날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였으며 식욕도 없고 잠도 잘 못자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뭐든 잘 먹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맛있게 먹는 척을 했다. 물론 절반 이상을 남기게 되었다.
잘 먹는 사람으로 보이기 실패.
그러면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보여야 겠다 싶었는데 퇴사할 회사 대표 욕만 신명나게 해버렸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보이기 실패.
그러다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차로 데려다준다는 말에 경계심이 들었다. '무슨 생각인거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지?' 하지만 친구의 친한 사람이기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핸드폰 암호는 풀어놓은 채로 언제든지 전화를 걸 수 있는 상태로 꽉 쥐고 차를 탔다. 그리고 동네에 있는 큰 건물 근처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차 안에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변 풍경을 봤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차에서 내리기 싫다는 생각을 했고 쭉 어딘가를 향해서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타깝게도 달리진 못했다. 동네에 데려다 준 너는 차에서 함께 내리면서 괜찮다면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동네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우리는 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너의 말을 들으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순간 내가 즐거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즐거웠고 너와는 계속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을 만났고 만나서 이야기만 몇 시간을 했다. 헤어지면 너무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잠기고 배가 고플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만나고 있고 계속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차분해 보이지만 속은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하다. 하지만 너는 이렇게 불안한 나를 안정감있게 잘 잡아준다. 나는 꽤나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자만하면서 살아왔다. 미성숙하지만 성숙한 척을 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어쩔때는 버거웠다. 나 스스로에게 지쳤다. 너에게만은 자만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미성숙한 나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나 그대로를 보여줬다. 이런 나를 보면 도망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너는 옆에 있다. 너또한 나에게 미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서로에게 성숙하면서도 미성숙한 존재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가 부끄럽지 않다.
'이게 나야'
'그래, 괜찮아'
너를 만난 후 부터 나는 나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주기로 했다. 이 안식처에서 부디 편히 쉴 수 있게끔 각자 노력도 해야하며 끊임없이 부딪히고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 이 과정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두려움도 감수할 수 있다. 그만큼 너를 곁에 두고 싶다.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도 받고 싶지만 사랑을 주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다.
지금 이대로의 나도, 너도 괜찮아.
괜찮아. 이 말을 너무나도 듣고 싶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