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도전: 나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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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도전: 나 지키기

나는 더이상 예쁨을 목표로 하고 싶지 않다.

윤해원

한때 나는 욕심도 많고 자존심도 쎈 사람이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성적을 받고, 이기고, 인정받는게 나에겐 너무 중요하고, 또 익숙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 후, 고등학교 시절에 벌써 창업 한번 정도 해보고 논문 한번쯤은 출판해본 각국의 능력있는 젊은이들을 만나며, 늘 잘해왔다 생각했었던 내가 사실 뒤쳐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좀 더 노력하지 않은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고, 무슨 천지이변으로 내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입학을 한 건지 혼란스럽고 기가 죽었다.  

자존심 때문에, 질것같은 게임은 시작하기도 싫어서, 시도도 하기전에 중간 자리를 포용할 준비부터 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욕심을 버려야 행복한거다" 라는 주문은 최선을 다한 후, 결과를 기다릴때 써야 하지만, 최선을 다 했을때 실패할 내가 두려워서, 비겁하게 노력 없이 주문만 외웠다.  

1-2학년 내내, 최소한의 노력으로 성적 관리만 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뤄가는 과외의 성취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내 능력 밖의 일이라 단정지었다. 그리고 나는 똑똑하고 열정있는 학생보다는 예쁘고 잘 노는 학생이 되기 위해 힘을 썼다.  화장과 파티에 시간을 쏟고, 하나같이 별로인 남자들도 꽤 만났다.

하루는 1학년 초에 잠깐 만났던 남자애와 침대에 누워는데, 그 애가 문득 함께 듣는 강의 성적을 물었다. 자신 있는 과목이라 높게 받은 내 성적을 얘기해주니, 자기보다 4점이나 높은데 그점수가 확실하냐며 못믿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리고 사실이라 말하니, 씩 웃으며 '어쭈, 얘 봐라?' 하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은 듯한 모습을 되새겨보니, 그 애 눈에 나는 작은 똥개, 내 성적은 귀여운 재롱 쯤으로 보인듯 했다.  

또 한번은, 남자학생 여럿과 여학생 A와 함께 밥을 먹는데, 누군가 A에게 "이 학교에는 예쁜 여자도 많고 똑똑하고 열심히 사는 여자도 많지만, 너같이 둘 다 하는 사람은 드물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는 친구를 보며, 윤해원은 분명 세번째 종류의 여자가 아니라는걸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침묵속에 생각했다는걸 깨달았다.  

이 두 상황에서 내가 크게 기분 상해하지 않았던건, '남자들의 인정따위 중요하지 않아!' 라는 진보적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나는 "마냥 예쁘고 공부는 못할것같은 애"라는 칭호가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시간을 되돌린다면 어떤 똑부러지고 논리 정연한 대꾸로 나의 지능을 뽐낼지 상상하며 혼자 씩씩되곤 한다.   철없는 대학생의 인생은 분명 쉽고 재밌었다. 하지만 이젠 정신을 차릴 때 됬다.

나는 더이상 예쁨을 목표로 하고싶지 않다. 더 큰 꿈을 꾸고싶다. 



그래서 결심한 뉴욕에서의 내 첫번째 도전.  

누군가 나의 능력과 가능성을 무시할 때, 침묵 또는 수긍하지 말기. 

언젠가부터 나는 철없고 능력도 꿈도 없는 사람이란 의견에 수긍하며 나의 욕심과 자존심을 놓아버렸지만, 이젠 내가 나를 믿어주고 내편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도전을 실천할 기회는 빨리, 그리고 자주 왔다.  

토요일, 공대생 친구들을 따라서 브루클린에 있는 일명 '공대파티'에 갔다. 전망좋은 루프탑에서 뛰노는 기계공학, 토목공학, 화학공학 전공들 사이에  유일한 문과생으로 의도하지 않게 스파이가 된 느낌이었지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공학이야?" 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사회연구와 공공정책"전공 (Social Research and Public Policy-우리 대학에만존재하는 전공이다) 이라 대답을 하니, 실실 웃으며 그건 또 무슨 가짜 전공이냐, 인생 쉽게 산다, 어쩐지 공대생같이 생기진 않았다 등등 별별 "농담"을 다 들었다. 다들 웃고 즐기러 온 파티이기도 하고, 다수에 밀려 기가 죽어, 그냥 웃어 넘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도 첫 도전인데 노력은 해봐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비거는 공대남들에게 (반전없이 나를 무시한건 죄다 남학생들이었다) 내 전공이 뭔지 기억이 나냐고 물었다.

예상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옳다구나 하고 나도 똑같이 실실 웃으며 3년동안 그 잘난 공대교육 받으면서 1초전에 들은 단어 4개를 못외우냐, 요즘 시대에 외모로 사람 판단하는걸 보니 확실히 공대생들은 사회흐름에 무지하다, 공학 이름이 아니면 귀를 닫게 뇌를 파이썬으로 프로그래밍 시켰냐며 "농담"을 되돌려 주는데, 세상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가끔 버럭 화를 내는 남자들에게 그저 농담인데 왜 이렇게 감정적이냐, 공대생은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추구하지 않느냐 물으며, 속으로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날 만난 공학 친구들이 다음날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은 이상, 다시는 그 좋은 루프탑 파티에 초대받지 못하겠지만, 내 첫 도전은 성공적 이었다. 

이제는 농담으로라도 나를 깎아내는 말에 수긍하고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공대파티 초대권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니까.


                                                                                             조금 취한 브루클린,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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