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3년. 한창 당시의 애인과 열린 관계(Open Relationship: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인 일부일처제의 모델을 따르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하는 건 허용)를 실험해 보고 있던 참이었다. 나나 애인이나, 단 한 사람이랑만 평생 성관계를 해야만 한다는 점은 납득하기 힘들었고, 이에 대해 서로 합의까지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낯선 사람과 성관계를 맺고 난 후, 우리가 동거하던 집에 돌아와 그의 옆 자리에 누운 순간, 그는 ‘더럽다’며 날 밀어냈다. ‘더럽다’는 표현은 그림자처럼 날 평생 따라다닌 주홍 글씨였다.
만화를 한창 많이 보고 따라 그리던 초등학교 시절, 호기심에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 여성을 연습장에 그려본 적이 있었다. 가슴은 잎사귀로 나름 자연스럽게 가렸었는데, 그림 연습장을 돌려보던 친구들이 내 그림이 ‘더럽다’며, 뭘 이런 걸 그리냐고 놀림을 받은 기억이 있다. 나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매운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 시절, 한창 유행하던 버디버디나 세이클럽에서 채팅을 하다가 연상의 남성이 ‘거기를 한 번이라도 만져봤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전혀 더러운 게 아니라고, 손가락으로 한 번 만져보라고 시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난 어렸을 적부터 못생긴 걸로 유명했다. 가족이 날 ‘입 큰 개구리’라는 별명으로도 불렀었다. 그래서 언제나 소위 ‘일진’이라고 하는, 예쁘고 인기가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그러던 와중 ‘일진’이었던 한 오빠를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생일이라며 생일 선물로 내 첫 키스를 달라는 요구를 해 왔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흔쾌히 그의 집에 방문했고, 그가 날 유린할 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고, 그의 것을 입에 넣으라는 요구는 차마 들어줄 수 없었다. 그 이후, 그는 심심할 때마다 날 불렀다. 그와 시간을 보낸 후 집에 돌아가는 길, 얼굴은 언제나 화끈거렸고 온 몸이 축축했다. 그가 다른 일진 언니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날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학창 시절 계속 스스로를 더럽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더 더럽다고 생각했다. “순결만 안 잃었으면 뭐 하나? 이미 해볼 건 다 해봤는데.”라고 되뇌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날 으슥한 곳으로 불러내서 가슴을 만지며 키스를 했다. 만지는 게 싫다는 표현을 몇 번이나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키스를 할 때면 종이 울리기 만을 기다렸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는 척했다. 우리 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더러웠다. 종이 울리면 그제야 가슴까지 올라온 교복을 황급히 내리며 교실로 뛰어갔다. 그는 수능을 잘 보는 선물로 나와 관계를 맺자고 했다. 내가 그보다 수능을 잘 보면 관계를 안 맺어도 되지만, 나보다 그가 수능을 잘 보면 내가 그와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더 이상 내가 이 요구를 농담으로 넘기기 어려워졌을 때, 우린 헤어졌다. 그가 내 가슴을 만졌던 촉감을 쉽게 잊지 못했다. 그의 손이 닿은 곳마다 검은 타르가 쩍쩍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 만난 어떤 애인은 내가 민소매를 입었을 때, 누굴 보여주려고 그런 옷을 입냐며 화를 냈다. 민소매 옷만 입었을 뿐인데 더러워진 기분이 들었다. 다른 애인은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 모르게 내 맨 허리와 가슴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여기서는 흥분하기 싫은데, 그렇게 만지면 흥분하게 되니까 만지는 게 싫다고 표현을 했다. 그랬더니 그게 더 좋다고 더 시도 때도 없이 만져댔다. 옷 안으로 능구렁이같이 들어오는 손을 끊임없이 웃으며 밀어내야만 했다. 정색을 하면, 이런 것도 못 하게 하냐고 되려 화를 냈다. 그 때 처음으로 내 몸이 역겨웠다. 가슴을 떼어내고 싶었다. 남성의 손이 자석처럼 달라붙게 되는 내 몸이 증오스러웠다.
관계를 할 때면, 누구는 날 보고 정액이 더럽다고 먹지 말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정액이 더럽냐고, 왜 안 먹냐고 다그쳤다. 누구는 생리가 더럽다고 했고, 누구는 생리가 더러운 게 아니라 야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은 내가 더럽다며, 본인의 정액으로 날 ‘깨끗하게’ 해 준다고 했다. 질내 사정을 한 후, 속옷 위로 흘러내리는 정액의 느낌은 매번 더러웠다. 어떤 사람은 깨끗하다며 내게 본인 침을 막 뱉고는 했다. 다른 사람은 나보고 침을 뱉어 달라고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 항문이 더러웠다. 다른 누군가에게 내 항문은 깨끗하고 성스러운 순결한 것이었다. 난 끊임없이 낙인이 찍혔다가 지워졌다. 난 동시에 더러우면서 깨끗했고, 역겨우면서도 범해졌다.
인터넷에서는 이런 얘기가 오가곤 했다. 동거하며 한 사람이랑만 천 번 관계를 맺은 여자가 더 더러운지, 아니면 천 명과 각각 한 번씩만 관계를 맺은 여자가 더 더러운지를 투표로 올렸다. 욕을 섞어가며 세상의 불의에 대해 논하고 있자면, 방석집에 다니던 어떤 선배가 나보고 여자애가 말을 그렇게 더럽게 하냐며 핀잔을 주곤 했다. 더러운 건 언제나 여자였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수건이 될 수 없다는 댓글을 읽었다.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다.
그들 말마따나 아무리 빨아도 수건이 될 수 없다면, 그냥 걸레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더럽다고 느끼는 부분은 그들에게는 더러운 게 아니고, 난 그들이 더럽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더럽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김걸래가 되었다. 그래서 나, 걸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김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