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성은 가해자가 될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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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성은 가해자가 될 수 없나요?

폭력적인 성향에 물들어가다

김GIRL래

나는 분명 데이트폭력의 피해자이며 생존자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가해자가 될 수 없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남성들의 폭력적인 성향에 길들여지며 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물리적 폭력만 가해라고 부를 순 없다. 가스라이팅, 협박, 스토킹과 같은 행동도 상대방에게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피해자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었다.


데이트폭력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는 상대방의 약점을 쥐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쥐려면 그보다 내가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의 핸드폰 비밀번호와 패턴을 외운 후, 그가 잠들면 몰래 일어나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바람을 피는 정황을 발견해도 당장 추궁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과 연락을 주고 받은 내용을 사진 찍어놓고, 상대방 여성의 핸드폰 번호를 저장해두어야 한다.

상대방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기억하거나 패턴을 외우는 것은 아주 오래 집중을 요하는 일이다. 무조건 보여달라고 하면 증거를 지워버릴 수 있기에 절대 핸드폰은 보여달라고 하면 안 된다. 핸드폰에 관심이 없는 척해야만 그가 방심하고 내 앞에서 핸드폰 패턴을 풀기 때문이다. 핸드폰 패턴을 풀 때에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을 잘 관찰해야 한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면 안 되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정확한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을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한다.

비밀번호를 알아낸 후에는, 밤에 몰래 움직여야 한다. 그가 화장실을 갈 때, 잠시 자리를 비울 때 등 몰래 핸드폰을 보는 건 리스크가 큰 일이므로 지양해야 한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는 척을 해야 하는데, 숨은 깊게 쉴 수록 좋다. 그가 잠이 들 때까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려야 하는데, 숨소리의 변화를 알아내면 좋다. 그가 혹여나 안고 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움직여야한다. 그의 팔이나 다리를 다른 위치에 놓아서는 안 되고, 잠든 몸이 최대한 움직이지 않게 빠져나와야 한다. 이는 30분에서 1시간도 더 걸릴 수 있는 일이기에, 정말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씩 움직여야만 한다. 이는 핸드폰을 몰래 보아야 했을 때 외에도, 위험한 자취방이나 모텔에서 몰래 빠져나와야 했을 때 자주 사용했던 기술이었다.

핸드폰을 비번을 풀기 전, 내 핸드폰의 무음 사진 앱을 틀어야 한다. 그의 핸드폰이 역시 무음인지 확인한다. 카톡, 사진첩, 전화 순으로 확인한다. 바람피는 증거를 사진을 찍어놓는 것 외에도, 상대 여성분의 전화번호를 저장해놓는 것이 중요하다. 증거는 많이 모으면 모을 수록 좋다. 그에게 내색해서는 안 된다. 타이밍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복수를 했다.


그가 나와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을 안 상대방 여성은 당황했다. 그가 당신에게 빌려준 아이패드, 내가 그에게 선물한 거라고. 오른쪽 윗 귀퉁이에 금이 있지 않냐고. 내가 떨어트린 거라고. 그가 한 팔찌, 나와 한 커플 팔찌라고. 그는 그게 할머니가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에 가족이랑 보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 날 나와 여행갔다고. 그가 자주 쓰는 만년필 있지 않냐고, 내가 선물해준 거라고. 검정색 라미 만년필에 필기체로 이니셜이 각인된 그것. 그가 바람을 피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니까 안전이별하시라고 당부했다. 그녀와 나눈 대화를 녹음하고, 나도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가 나와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여성도 있었다. 바람을 좀 피면 뭐 어떠냐는 여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꼼짝할 수 없는 약점을 잡으면 복수를 한 것 같았다. 그 땐 그게 정의인 줄 알았다. 그 땐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내가 사귀던 사람과 그 주변의 인물들에게 피해를 주고도, 끊임없이 정당화를 했다. 상대방 여성의 소셜 미디어를 염탐하고, 나와 비교했다. 나보다 그녀가 더 예쁘니까, 바람을 피웠나? 좀 더 살을 빼야 하나. 나보다 그녀가 더 똑똑하니까, 정치 공부를 더 했어야 하나? 그녀가 더 여성스러운데, 나도 스타일을 바꿔야 하나? 그가 바람을 핀 원인을 끊임없이 나에게로 돌렸다. 내가 조금만 더 예뻤다면, 내가 조금만 더 여성스러웠다면, 내가 조금만 더 돈이 많았다면, 내가 조금만 더.


그래서 여성성을 내재화하게 되었다. 애교를 부렸고, 화장을 자주 하곤 했다. 바지보다는 치마를 자주 입었다. 그가 기대하는 여성성을 일부러 더 표현하곤 했다.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매일 저녁상을 차려놓았다. 그러면 혹시 좀 더 날 사랑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포르노에서 내는 소리를 따라했다. 적극적으로 여성성을 이용했다. 그럴수록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바람을 피지 않는 상대방을 만나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분명 바람을 필 거야, 지금은 안 피지만, 앞으로 피게 될 거야. 상대방에게 100% 솔직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거짓말을 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거야 –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전 남자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일찍 잤어 – 사실은 술을 마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들이 했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다. 왜 날 떠나느냐고 자해를 하며 상대방을 협박했다. 네가 나에게 또 다시 이별을 고하면 자살을 할 거라고 통보했다. 상대방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날 발견했다. 잘못이 없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죄책감이 들게 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조정하려했고, 그렇게 따라주지 않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상대방은 날 질려하며 떠나갔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가해는 저절로 그 다음 사람에게 물려지게 된다. 피해자성에 사로잡혀서 가해를 하는지도 모르게 하게 된다. 가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내 피해자성에 사로잡혀서 나로 인해 피해받는 사람을 망각하게 된다. 내가 피해를 받았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억울하지만. 과거에 받은 상처는 오로지 내 몫이고, 그걸 극복하는 것 역시 오로지 내 책임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언제나 의심하고 내 자신을 의심하는 습관은 특히 오픈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현 애인과 오픈된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다투고 쌓아왔는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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