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애인이 있어요. 저와 섹스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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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애인이 있어요. 저와 섹스하실래요?

여성으로서 오픈된 관계를 유지하는데 부쳐

김GIRL래

“나 내일 저녁에 데이트 약속이 잡혔어, 어떻게 생각해?”
“괜찮아! 누구야?”
“소영이라고, 틴더에서 만났어.”
“알려줘서 고마워. 난 내일 저녁에 집에 계속 있을 계획이야.”

많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이상한 대화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와 내 애인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의 일부분이다. 우린 오픈된 관계(Open relationship)에 있기 때문에.

오픈된 관계란 자유로운 성관계를 추구하는 사귐의 한 형태이다. 한국에서 좀 더 많이 알려진 다중연애 (폴리아모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2명 이상 있을 수 있는 관계를 뜻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 곧 정신적으로는 서로에게 순결을 지키는 관계이지만, 성관계는 (이론적으로는) 자유롭게 누구와도 할 수 있다.


오픈 관계의 가장 어려운 점 하나는 섹스과 사랑을, 혹은 섹스와 감정을 분리하는 일일 것이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한국에서 자랐건 성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은 외국에서 자랐건, 섹스와 감정은 주로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로 섹스는 ‘사랑을 나누다’라고 표현하고, 영어로도 ‘make love’라고 하니까. 한 사람과 섹스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 사람에게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귀던 사람과 섹스를 하는 빈도수가 줄으면 걱정했다. 혹시 내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나? 나보다 더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겼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관계를 맺어왔었다.

하지만 난 첫 번째 애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오픈된 관계를 지향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난 내 애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성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너무 좋고, 나 역시 많은 사람들과 섹스를 하길 원했고, 그걸 충족시켜주는 관계는 오픈 관계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머리로 오픈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간극은 꽤 컸다. 그건 내 애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우린 사귀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처음부터 오픈 관계를 추구하고, 그렇다고 밝혀두고 시작했다. 누가 먼저 하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우린 스스로 틴더와 같은 데이트 앱 계정 프로필에 오픈 관계에 있음을 밝혀놓았다. 하지만 그가 처음 “나 데이트 약속 잡혔어”라고 말하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이없게도. ‘나로 충분하지 않나?’ ‘내가 어디가 부족하지?’ ‘내가 벌써 질렸나?’ 그가 3시간 동안 그녀와 술을 마시던 시간은 정말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질투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3시간 안에 그녀의 매력에 빠지면 어떡하지? 나보다 그녀가 더 좋아서, 나보고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나와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녀를 선택할 정도면, 난 얼마나 못난 사람인가? 그가 돌아온 후, “나 사실 약간 질투났어”라고 솔직하게 말했고, 그는 이해한다며 날 진정시켰다. 본인도 내가 다른 남자와 잘 때 질투가 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질투는 우리 관계에 건강하지 않은 감정인 것 같아. 그래서 질투를 하게 될 때면, 게임을 하거나, 그거에 대해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 그는 그의 말대로, 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 들어왔을 때 게임을 하고 있었고, 다정하게 웃으며 키스를 건네며 내게 물었다. “좋은 시간 보냈어?”



우리라고 해서 우리 관계에 굴곡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나라고 해서 질투를 못 느낀 게 아니었고, 밤새 울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내 감정과 울음이 가르쳐준 것은 결국 내 약점이고, 내 편견이고, 내가 이 관계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뭔지를 다시 가르쳐주었다. 이 관계의 초반에는 내 약점과 내가 가진 편견들이 속속들이 들어났다. 나를 버려두고 다른 사람과 놀러 가는 건, 내가 어디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내가 좀 더 키가 컸더라면, 내가 섹스를 더 잘했다면, 이런 생각들이 날 잡아먹었었다. 혹시 나랑 더 이상 사귀기 싫어서 그런 걸까? 나랑 헤어지고 싶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에 그에게 한 번은 솔직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넌 왜 많은 사람들과 섹스를 하길 좋아해? 그의 답변은 아주 간단하고 명확했다. 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 그게 섹스이든 친구이든 뭐든 – 좋아해.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하는 걸까? 물론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싶다고 바로 믿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바로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말들이 있으니까. 그도 물론 처음에는 내 말을 믿지 못했다.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과 섹스할 때 걸래의 기분이 좋을 수 있지? 말만 그렇게 하고, 사실은 아닐 수도 있잖아?

어느 달은 나와 데이트를 하는 시간보다 다른 사람들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싸운 적이 있다. 날 우선 순위로 생각하는 거 맞냐고, 내가 네 1순위인 사랑하는 사람 맞냐고, 그런데 왜 난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냐고. 그가 남자와 데이트를 하러 갔을 땐 여자와 데이트를 하러 갔을 때보다 더 안심하는 날 보며 놀란 적도 있었다. 난 범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적인 생각을 버릇처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 집에서 자고 들어온 날에는 혼자 집에 있던 내가 너무 비참해서 헤어질까를 생각도 했었다. 우리가 하는 섹스의 빈도수가 낮아지자, 난 그에게 우리가 사랑하면서도 섹스 없는 관계를 유지할 바에는 다중연애를 하는 게 낫지 않냐며 따진 적이 있다. 난 사랑이 가득한 섹스도 하고 싶은데, 넌 나랑 섹스하기 싫으니까, 난 날 사랑도 해주면서 섹스도 할 사람을 만날래,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성적인 관심을 요구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내 이전 관계에서는 성적인 관심이 그렇게도 불쾌하고 구속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런 싸움과 굴곡 없이 ‘비정상’적인 연애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껏 ‘정상’적인 연애만 했고,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정상’적인 연애에서 기대하는 바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연애를 지속하고, 동거를 함께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유일하게 사랑하고 있다. 난 그의 가족을 알고, 그의 가족도 날 딸로 생각하고 있다. 우린 결혼이라는 제도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그냥 결혼 없이 ‘사실혼’ 관계로 쭉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게 가능한 건 아마 이 모든 ‘비정상’적인 시도 가운데, 솔직함과 신뢰를 최우선으로 두고 싶은 서로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도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에게 이미 본인은 사귀는 사람이 있고, 이름은 걸래이며, 함께 산다고 미리 말을 하고 만난다. 그리고 그는 데이트를 가서 내 얘기를 매우 많이 하며, 또 난 꽤 자주 그의 데이트에 초대를 받곤 한다. 왜냐하면 우리 서로가 궁금해하고, 서로를 더 알아가고 싶고, 우린 서로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 관계를 더욱 더 풍성하고 재미있게 만드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이제껏 함께 만났던 사람들은 다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 있다. 우린 셋이서 혹은 그 이상 모여 함께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러 가고, 집에 초대해서 보드게임을 하곤 한다. 섹스가 있든 없든 다같이 친구가 된 것이다.



내가 오픈 관계를 좋아하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아보라면, 그건 바로 내 인생 처음으로 애인에게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된 점이다.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나를 내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줄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 말은 곧 모든 성적인 기대, 그와 연결된 모든 젠더에 관련된 기대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관계에 있어서 ‘여성/남성스러움’이란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 요소가 되었다. 내가 삭발을 해도, 겨털을 깎지 않아도, 소년처럼 보이고 싶어도, 소녀처럼 보이고 싶어도, 살이 찌나 빠지나, 브라를 하건 안 하건, 문신이나 피어싱이 많아도, 내가 망사를 입든 턱시도를 입든, 욕을 입에 달고 살건 담배를 피건, 이성과 밤 늦게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든 말든, 내가 설령 무성애자가 되거나 내가 여자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리고 지금처럼 계속 ‘걸래’로 산다고 해도, 그는 날 사랑해줄 것이라는 점, 왜냐면 여성이 아니라 사람으로, 한 명의 인간으로 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어쩌면 우리 여성들이 우리의 애인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닐까, 사회에게 바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그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 봐 주기 원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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