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은 하세요> 리뷰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익히 밝힌 것처럼 내가 <안녕은 하세요>를 보며 웃기 시작한 건 영은과 보금이 만나면서부터다. 중학생 때부터 오픈리 레즈비언으로 살았던 보금은 영은이 자신을 좋아했고, 지금은 레즈바를 오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보금은 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는 상황. 마음이 쓰린 와중에도 영은이 보금을 보며 설렐 때마다 입을 읍!하고 다무는데. 감정이 입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양 입을 꾹 다무는 얼굴. 흑심을 자제하려는 안영은은 너무나 귀엽다! 두근거림이 얼굴에 베시시 한 빗금으로 나타나는 순간에도 '눈 마주치지 마!', '설레지 마!'라며 자신을 다독이는 영은을 귀여워하는 게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것에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영은이 화이팅!).
또 사람이 사람에게 빠지는 과정이 다 그렇지 않나. 상대가 한 눈에 내 안에 들어오거나, 쌓인 호감 위로 나의 문제를 덜컥 말해버리게 되는 일. 여태껏 털어놓지 못한 것들을 처음 서로에게 말하고, 힘을 나누고, 마음을 물어봐 주는 시간들이 계속해서 겹쳐질 때. 영은과 보금은 각자의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임에도 세상에 떠다니는 온갖 따스함을 서로에게 부어준다. 한 사람이 우울한 냄새가 나는 날에 그걸 알아봐 주는 것도 상대방이다.
이렇게 영은과 보금의 설렘 포인트를 한껏 다져놓았는데. 정작 내 핸드폰 사진첩 속 <안녕은 하세요> 캡처본 비율은 두 사람이 웃는 것보다 울 때가 더 많다. 만화, 글귀, 채팅 그게 무엇이든 좋은 걸 보면 캡처해서 지니는 나의 습관을 돌이켜 보면, 나도 만화를 보며 웃는 것보다 우는 순간이 더 많았나 보다. 여자라서 노출되는 폭력과 소외, 독립이 간절한 상황에서 연애도 안정을 주지 못하는 상황은 나 또한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보금은 정국민을 피해 가출한 영은이 새롭게 자리 잡은 곳에서도 희롱을 당하자 물불 가리지 않고 남자를 쫓아낸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만화 속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한편으로 나는 보금의 행동에 어떤 안도감을 느꼈었다. 여자 둘이서 해코지 하는 남자 하나를 못 당해낼 때마다, 나를 지켜줄 아빠(남자)를 떠올리는 건 꽤나 비참한 기분이니까.
"내 형편엔 안전이 너무 비싼 것 같아"
"도망치는 것과 버려지는 것. 그 사이는 어떻게 유지하는 걸까"
가정폭력으로 어릴 적부터 본가를 나와 살았던 보금은 옮겨진 지금의 자리에서 튕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연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보금이 결국 이별을 맞게 될 때, 나는 몇 번이나 스크롤을 되돌려 가며 보금의 속마음을 캡처했다. 뭔가를 했다면/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랐을 거라는 생각.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으니 당연한 게 아닌가.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병원도 들럭거리게 된 나로서는 보금이가 외로움과 어느 정도 거리 두기를 실현하게 됐을 때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감성이 충만한 새벽녘, 그렇게 만화는 내가 완벽한 완충재가 돼주었다.
서서히 회복이 필요한 관계와 영원히 단절해야 할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 만화가 관계를 맺고 끊어내는 방법은 지금의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사이다'다. 굉장한 현실 고증으로 대한민국 장녀 레즈비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안녕은 하세요>는 분명 'xx 죽어!'를 연발하게 되지만. 영은과 보금의 꽁냥거림은 죄가 없다. 두 사람이 안녕을 묻는 방식은 나에게 그랬듯 보는 이에게도 몸에서 하트가 내뿜어지는 경험이 될 거다(만화 속 영은과 보금은 서로를 통해 행복을 느낄 때마다 몸에서 하트와 꽃을 내뿜는다. 끝까지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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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은 하세요>(검둥)은 저스툰, 봄툰, 리디북스,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시리즈, 미스터블루에서 완결 회차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