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모든 언니에게(1)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헤엄아. 이리와 봐. 여기 이 손님도 글 쓰는 작가시래.”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는 어쩐지 둘 다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동시에 웃었어요. 아 안녕하세요. 네 하하 안녕하세요. 그때서야 언니와 제대로 인사를 하게 되었고 사장님이 저를 대신해서 어쩌면 제가 하고 싶었을지도 혹은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말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얘는 우리 직원인데, 아주 똑똑하고 똑 부러진다. 내가 아주 아끼는 동생이고 예술학교의 문예창작과를 다니고 있다. 분명히 글도 잘 쓸 것이다. 얘가 종종 내가 만든 칵테일 맛을 한 줄로 요약 평가해 주는데 나는 그걸 듣는 재미로 산다. 그래서 얘한텐 자꾸만 공짜 술을 주게 된다. 전에는 내가 만든 스노우 볼이라는 칵테일을 마시고는 어떤 평가를 했는데 그때 뭐라고 했더라?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들. 언니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들어줬었는데 저는 그게 참 쑥스럽고도 좋아서 사장님을 좋아도 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언니. 언니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글을 조금씩 쓴다고 했었어요. 언니의 글도 무사한가요? 안부합니다. 언니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무언갈 연재한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언니가 이름을 말하자 사장님은 그제야 언니 이름을 주문서에 받아 적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인의 주문을 받을 땐 바로바로 카드나 현금을 받아 한잔씩 결제했지만, 한국인이 오면 주문서에 이름을 적고 주문을 달아놨다가 나가기 직전에 한꺼번에 계산을 해주었거든요. 물론 한국인 손님은 거의 없었어요. 주말에는 하루에 한 테이블이 올까 말까.
유모든 혹은 유모두. 나는 그 이름을 빠르게 기억했습니다. 퇴근하면 네이버에 검색해 보려고요. 언니는 계속해서 사장님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사장님의 애인이 끼어들었고 때로는 단 둘이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어떤 미군이 와서 언니랑 같이 포켓볼을 치러 내려갔어요. 사장님은 저에게 저 작가가 멋지지 않느냐 몇 번이나 물어보았어요. 저는 당연히 멋지다고 했습니다. 사장님은 저에게 저 사람도 충분히 멋지지만 너는 더 유명해지라고 했어요. 저는 무심결에 네 라고 대답했는데 그 후에 아주 많이 후회했습니다. 이층의 일을 해결하고 일층으로 정리를 하려고 내려갔는데 언니가 바에 앉아있었어요. 일층 마감을 하기 위해서 일층에 쌓인 설거지를 돕는데 언니가 저에게 말을 걸어왔어요.
“여기 동네가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진심으로 웃었습니다. 왜 좋은지 도저히 모르겠어서요. 어떨 땐 정말 모르는 것을 앞에 두면 웃음으로 때우곤 하잖아요. 제가 보니까 언니는 분명히 취했어요. 처음에 봤을 때랑은 좀…. 아니 영 달라보였거든요. 그래도 아직 호기심이 있었어요, 언니한테. 하는 일이 미국인과 대화하고 부딪치는 일이다보니 그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무조건 멋져보였거든요. 그리고 사람이 취하면 좀 웃기잖아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요?” 언니가 뭐라고 뭐라고 대답을 하긴 했는데 설거지하는 물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요. 스테인 글라스 개수대에 수압이 센 물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언니도 알죠?
그렇게 취한 사람과 들리지 않는 사람의 대화가 아슬아슬 계속되었어요. 나는 계속 네? 네? 라고 묻고 언니는 계속 뭐라 뭐라 말을 하고. 지금 생각해보니 언니가 왜 내 기억 속에 남아있으며, 왜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거짓말이에요. 왜 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건지 그 이유가 정확히 기억나요. 사장님이 언니가 좀 취했고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는 것 같다면서 나하고 한명의 오빠를 불러다가 언니가 예약한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어요. 걸어서 한 오 분 남짓 걸리는 호텔이었어요. 그 호텔까지 걸어갔던 길 때문에 언니에게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에요.
같이 가는 오빠는 여자 친구와 긴 통화를 하고, 저하고 언니는 어딘지 듬성 비어있는 대화를 시작했어요. 언니는 저에게 언제 글을 쓰냐고 물어봤고 저는 잘 안 쓴다고 대답했습니다. 진짜 솔직하게. 그러니까 언니도 “오 나도 그런데.” 그렇게 말했던 게 기억이 나요. 그래서 우리의 대화가 점점 하나의 길에서 만나던 것이 아주 반가운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언니는 이어서 저에게 왜 잘 쓰지 않느냐고 물었고, 저는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그 당시 제 동기간의 유행어 같은 거였어요. “할 말이 없어. 난 할 말이 없어서 쓸 말도 없어. 와하하하. 흑흑흑.” 그렇게 우리는 자신에게 또 서로에게 설득하듯 되뇌곤 했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온 것 같아요. 저는 할 말도 없고 쓸 말도 없어요. 수업시간에 합평하려고 둘러 앉아있으면 돌아가는 기계의 불량 부속품 같은 게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은 다 잘 쓰고.”
저는 대학에 가기 전에 한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불량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저는 압니다. 어떤 불량은 단번에 버려지고, 어떤 불량은 계속해서 고쳐져요. 쓸모 있어질 때까지. 양품 딱지를 받을 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 몇 번의 불량을 알리는 붉은 삐-- 소리를 견디고, 드디어 연두색 양품 불이 들어와요. 그 순간은 조금은 반갑고, 많이 슬픕니다. 그렇게 양품이 되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포장되어버려요. 처음부터 잘 생겨먹었다는 듯이.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어떤 날엔 귀에서 삐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것만 같아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언니를 만났던 그 전 주에 이제는 정말 뭔가 된 사람의 시와 내 시를 번갈아 합평했었는데, 나는 혹평을 받고 그 사람은 호평을 받아서 제 자신감은 아주 바닥을 치고 있었어요. 많이 구리고 바보 같았지만 저는 이 정도의 말은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는 솔직하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슬프다고 하니까 언니가 저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할 말은 분명 생길 거라고, 할 말이 왔을 때 그걸 쓸 수 있는 악력이 있어야한다고. 어떤 규칙과 습관이 있어야한다고. 할 말이 없어도 쓰라고. 초라한 느낌이 들어도 쓰고.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들어도 쓰고. 그냥 적당히 계속 쓰라고. 그리고 쓸 생각이 있다면, 한 순간도 그만두지 말라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작가니까 그런 말도 하지. 저는 정말이지 별로인 인간이었네요.
그러면서 언니는 슬프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한번 슬프다고 말해진 것은 다른 감정이 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그러면서 언니는 그런 감정을 그냥 “음음음”이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제안했습니다.
언니 언니는 헤어지기 직전에 저한테 아주 이상한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나무가 있어요?” 나는 그 질문이 너무 이상해서 대답하지 못했어요. 아니 아마 대답하지 못했거나 혹은 없다고 했겠지요. 그리곤 우리는 그냥 영원히 헤어졌어요. 기억에 남는 나무가 있냐니. 무슨 질문이 그런가. 저는 생각했습니다. 언니가 무엇을 말하려고 저에게 그런 걸 물어봤는지 아직도 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편지를 쓰게 된 걸까요?
언니. 언니는 아직도 쓰고 있나요?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는 삶이 음음음할 때, 내가 정말 음음음할 때 가장 먼저 쓰는 것을 포기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쓰기라는 것이 나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는 듯이. 그런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요. 이제는 내가 나로부터 할 말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온 것 같다는 걸. 그리고 언니의 좀 이상한 질문에도 대답할게요. 기억에 남는 나무 두 그루가 있어요. 하나는 저의 죽은 고양이 토리를 묻어준 아주 작은 아기 소나무고요. 하나는 스물네 살에 생긴 정수리 땜빵에서 갑자기 새롭게 자라기 시작한 뻣뻣한 머리카락을 닮은 제 집 앞의 이름 모를 이상한 나무입니다. 언니 이제 언니의 질문에 답이 되었나요?
이제 제가 모든 언니에게 묻고 싶어요. 언니는 저를 기억하나요?
*<모든 언니에게> 끝
*관련 부록*이 계속 이어집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이경숙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던 조기정년제 폐지를 이끌어낸 여성 운동가. 여성의 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해 투쟁했고, 그 성과로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이 되었다.(참고서적: 출근길의 주문, 프롤로그(서문), 이다혜)
**정은경 현 질병관리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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