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긴 날만 기다리는 인간의 일기, 믿는 아픔(2)

핀치 타래여성서사일상에세이

해가 긴 날만 기다리는 인간의 일기, 믿는 아픔(2)

남 일이 아닙니다

개헤엄

**지난 화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누가 손님을 이렇게 버릇없이 맞이해?”

  “….”  나의 입이 지워졌다.

  내 옆자리의 웃는 입이 말했다. 

  “오늘 우리 직원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그러자 그 손님은 혀를 차며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커다랗게 말하기 시작했다.

  “뭐 어디가 어떻게 아프길래? 중병이야?”

“어. 그냥…. 속이 좀 안 좋대요.” 웃는 입.  

  “….” 나의 존재가 지워졌다.  

“요즘 애들은 참, 일하려는 근성이 없어.” 그리고 마침내 나의 마음도 지워졌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기어가다시피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이 그나마 이 회사 안에서 내가 가장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글펐지만 쉬고 싶었다. 몸이 다 펴지지 않았다. 허리와 배 사이께 어딘가를 부여잡고 나는 화장실에 도착했다.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방금까지는 정말 아픔이 잠시라도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짧은 틈이라도 내어준다면, 나는 카카오 택시를 불러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화장실에 도착해 바닥에 깔린 타일을 보자 나는 그냥 그곳에 좀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눕지 않고서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하얀데 어때. 좀 누우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바닥에 주저앉듯 퍼질러 앉았다. 머릿속에서 벼랑 간 두 개의 자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여긴 화장실이야. 이곳에 눕는다니 정말이지 미쳤군!”

“그래도 어떡해. 죽을 것 같은데! 그냥 괜찮아 질 때까지 만이라도 잠시 눕는 건 어떨까.”

그래도 두 번째 자아의 목소리는 궁지에 몰린 육체의 편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화장실에 누울까 말까를 고민하는 삶이라니. 어쩐지 내가 잘못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주저앉은 채로 벽에 걸려있는 화장지 두 어 칸을 뜯어 눈물을 찔끔 닦아냈다. 이런 일로 눈물이 나다니! 서른 살 답지 않구나. 개헤엄, 생리 15년차 프로답지 못하구나. 하지만 눈물이 났다. 물론 아파서였다. 하지만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손님 한명의 부축을 받아 사무실로 나왔다. 아니 옮겨졌다. 그리고 곧 그 손님은 “아가씨, 이 것 좀 먹어봐요.”하며 나의 책상 위에 하얀 설탕이 맛있게 코팅된 도너츠 하나를 올려주었다. 하지만 나의 귀에 그 말은 누군가 늘어진 테이프를 아주 멀리서 재생하는 것처럼 작고 느리게 들렸는데 가령 이런 식이었다. “으아그아쓰이이이, 으이 그엇 즈오옴 므어어억으어어보아아아이요오오오.” 아픔이라는 건 뭘까. 어딘가에 덩그러니 신발을 벗어 두듯이 두 귀만 남기고 육체만 터벅터벅 돌아오는 것. 이런 게 아픔인 걸까?


옆자리 웃는 입의 도움으로 카카오 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 자리에 더는 앉아있을 수 없었다. 입과, 존재와, 마음이 지워진 곳에 내가 더 이상 있을 수는 없는 거였다. 나는 나의 컴퓨터를 끄고 나와 휴게실이 있는 뒷문 거울 뒤쪽에 잠시 쪼그려 앉아 택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거울 속에 처참한 사람을 피하기 위해 살짝 몸을 틀었다. 그런데 웃는 입이 나를 향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 그렇게 아픈데 컴퓨터 끌 정신은 있니? 덜 아프구나.” 나는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픔이란 뭔지.  


그렇게 아프면 산부인과엘 가봐 자궁에 혹이 있을 것 같은데

아냐 천안에 대만 한의원이 더 좋아. 번호 알려줄까?

무슨 병원. 애 하나 낳으면 싹 없어져.

남자가 약이네? 남자가 약이긴 애가 약이지.

에이. 저건 아픈 것도 아냐. 나 처녀 땐 아주 떼굴떼굴 굴러다녔어!

우리 마누라도 때가되면 그래. 비위 맞추기 힘들어 죽겠어.

화장 하나 안하고 방방 뛰어다닐 땐 여잔가 했는데, 저럴 땐 또 영락없이 여자네.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여자로. 태어난 게. 그치?

 그치?

  그치?

   나는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나의 아픔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아픔과 함께 아픔의 어깨에 비스듬이 기대어 선 아픈 이의 아픈 마음이라는 것을 견뎌야 했다.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온전하게 믿을 수 있는 걸까. 혹은 믿기는 아픔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걸까. 아니라면 아픔이라는 건 뭘까. 보이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아플 때 머리 위에 아픔 게이지가 생성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삑. 이번 아픔은 별점 오점짜리 아픔입니다.” 버스의 안내음처럼 상대방에게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알려주는 게이지가 있다면 아픔을 손쉽게 설득할 수 있게 되는 걸까?


  택시에 타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뒷좌석에 안절부절 끙끙 앓는 나에게 기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아니… 새댁. 혹시 임신한 건 아니죠? 어휴, 어디 병원엘 가야하나?” “아니에요.” 말하자 그가 말했다. “그날인가 봐?” 나는 정말 그가 내 아픔 앞에서 단 일분만이라도 닥쳐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의 말을 견디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무실에 두고 온 희고 둥근 글레이즈 도너츠 하나였다. 죽을 만큼 아프면서도 마음 한켠에 스멀스멀 떠오르는 먹고 싶음이란…. 아픔은 얼마나 입체적인가. 

  집에 돌아와 침대에 전기장판을 키고 누워 극세사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빈속에 이지 앤 식스를 두 알 먹고 생리대도 크고 새것으로 바꿔 착용했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확인하니 한시가 좀 안되어 있었다. 잠에서 깨자 몸은 훨씬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시작된 건 육체에 대한 아픔보다는 마음의 고통에 가까웠다. “내가 엄살을 부렸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 정신에 컴퓨터를 왜 끄냐고 물어본 건 왜일까?”, “나의 아픔은 믿겼을까?”, “아니라면 나는 나의 아픔을 믿게 하기 위해 어떻게 했어야 했나.”, “더 리얼한 육체 아픔 연기자가 되어야 했을까?”, “유난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같은….

  하지만 “저 정말 아팠어요.”라고 말한다면 분명 사람들은 “믿어. 정말 믿지.” 하고 답할 것이다. 나는 보통 반성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오늘도 반성을 해보고자 한다. 나는 나의 아픔을 반성합니다. 나의 아픔을 대하는 태도도 반성합니다. 이런 일기를 쓰는 것도 반성합니다. 하지만 이 일기를 마무리 하는 지금 나는 이 일기를 읽고 누군가 이렇게 말할까봐 두렵다. “생리통이 그렇게 아픈 거야?” 믿는 아픔 앞에서는 한 번에 싹 낫게 할 신의 약을 줄 것이 아니라면 한번쯤 닥쳐주는 숭고한 마음이 필요하다. 



*<믿는 아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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