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픔은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아픔에게도 설명 불능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아픔을 설명하는 데에는 젬병이다. 나는 의사를 찾아가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의 아픔을 낫게 하리라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픔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깔끔하고 정돈된 말투나 태도 때문도 아니다. 그런 건 산만한 것도 병인 나에게 차라리 편안함과 안도감을 안겨 준다. 나는 내가 어디가 어떻게 언제부터 아팠는지 설명해야하는 모든 과정이 불편하다. 나의 아픔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이렇게 이만큼 아파요.’ 라고 계속해서 떠들어야만 하는 것이 어쩐지 슬프고도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아픔에 대해 말하다보면 나는 마치 허풍쟁이가 된 것처럼, 내가 정말로 이렇게까지 아팠나? 정말 여기가 아팠나? 이렇게 오래 아파왔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 질문 우물 하나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우물에다 대고 아픔에 대해 설명하려 덤벼들수록 어째 아픔과 나 사이에는 계속해서 더 큰 간극이 생기는 것만 같다는 것인데, 나는 이 이유를 인간에게는 아픔에 대한 설명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딸기는 ‘빨갛고 표면에 씨가 아주 많이 박혀있다. 그리고 입에 넣으면 약간의 침이 고이고 침과 섞인 딸기의 부드러운 과육을 조금 더 씹다보면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거미줄 같은 홑겹 커튼을 친다. 그리고 꼬득꼬득 작은 씨앗을 마지막까지 꼭꼭 씹다보면 입안에도 땅거미가 찾아오듯 점점 분홍빛 달콤함은 잦아들고 오돌도돌 씨앗의 까슬함만 남게 된다.’ 라든지 ‘빨갛고 깜찍한 네 살 아이의 시린 겨울 볼에 걸려있는 수줍은 웃음 씨앗 주머니 같다.’ 같은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모두 딸기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누구나 마음속에 딸기가 가득 담겨있는 이만 사 천원짜리 스티로폼 상자 하나씩은 있기 때문에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안심하고 딸기에 대해 어떻게든 설명해 볼 전의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딸기가 아닌 어떤 아픔이라면 어떨까?
며칠 전에 벌어진 일이다. 출근길은 흐렸고 곧 버스의 창문에 얇은 성에가 끼더니 송글송글 비가 맺히기 시작했다. 빗톨이 성에 낀 창문 위를 쪼르르 굴러다니자 투명해진 곳곳의 틈새에 풍경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순간 쌀쌀 아랫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빗길에 버스가 정차하고 출발할 때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치고 가는 듯 묵직한 진동이 몸을 때렸다. 무릎이 이빨을 부딪치며 사타구니가 콕콕 쑤셔왔다. 나는 휴대폰 어플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아, 오늘 그분이 나를 찾아 오시려는군.’ 나는 물건들이 어지럽게 뒤섞여있는 가방 안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고 신경질 적으로 휘저어보았다.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 때 그것은 운 좋게 하나쯤 발견된다. ‘다행’이라는 안도와 ‘하나로 충분할까?’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동시에 몰려온다. 회사에 도착해 컵을 씻어 엎어놓고, 커피를 내리고 주변 걸레질을 한 다음 화장실로 간다. 삼십팔일 만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늘 먹던 진통제 ‘이지 앤 식스’가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급한 대로 회사 상비약통을 열어 타이레놀을 꺼낸다. 이 깜찍한 크기의 알약 두 알이 오늘의 손님과 싸우기에 턱없이 부실한 무기라는 것을 나는 잘 알면서도 약을 삼키기 전에는 세 번쯤 기원한다. “오늘도 무탈하게 넘어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두 알의 타이레놀은 작은 신의 진실 된 눈빛처럼 희어 보인다.
일이 벌어진 건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앓으며 아픔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상체를 수그리고 자리에 엎드려있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은 노랗고 얼굴엔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나의 옆자리 상사 웃는 입(별명임)의 ‘아주 독하다’는 진통제마저 몇 알 얻어먹은 후였다. 하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웃는 입은 나와는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상사로 두 딸의 어머니이기도 한데, 그는 극심한 생리통과 PMS에 약 삼십여 년 시달려왔으며 얼마 전 산부인과로부터 자궁을 떼어내는 수술을 권유받았다고 한다. 그는 오늘 아침까지도 수술 날짜를 받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 달에도 또 그러면 큰 병원에 가서 정말로 수술 하려고해. 정말 명절 연휴 내내 죽을 뻔했다니까. 생리를 하면 하루도 행복하지가 않아.” 곧 시작하려는 것 같다고 말하는 나에게 그가 한 말이었다.
나는 내 자리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매일 앉아 일주일 중 6일, 하루 몇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는데 그날만큼은 첫 출근한 날보다도 내 자리가 낯설었다. 내 자리는 출입문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사람들이 드나들며 풍기는 담배 냄새와 각종 음식 냄새, 향수 냄새 때문에 계속해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내 콧구멍이 스멀스멀 악취가 올라오는 하수구가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화장실로 달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나는 도저히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내 몸을 운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아 이렇게 아프다면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다가도, 정말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다!는 이 두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아픔이 아픈 이유는 어쩌면 익숙한 것을 지워버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익숙한 것 마저 역겹게 만들기 때문일까? 나는 생각했다. 그때 한 손님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엎드려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누가 손님을 이렇게 버릇없이 맞이해?”
믿는 아픔(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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