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회복하는 인간의 일기 "걔 이별했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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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회복하는 인간의 일기 "걔 이별했대"(2)

남 일이 아닙니다.

개헤엄

*지난 화와 이어지는 글 입니다.


하지만 막상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좌식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실제로 많듯이, 그저 허허허 웃어넘길 수도 있듯이. 사실 이런 것도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좋겠다.  

미친 거라고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회사에서 특히 그 증상이 심해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어떤 날은 내가 이곳에서 다섯 달을 일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내가 이곳에서 할 줄 아는 것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르고는 “아이고 내가 미쳤지, 미쳤어.” 라며 설득이라도 시키려는 듯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치 커피가 담겨있는 종이컵을 이용해 사장님의 서류에다 우루과이 지도를 그렸을 때처럼. 서류 위에 콸콸 쏟아진 커피를 닦으면서 사장님의 한숨소리보다 보다 더 크게 “내가 미쳤지, 미쳤어!” 하고 스스로를 꾸짖는 거다. 흠, 사장이 되려면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 거로군. 게다가 나처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뒤로는 숨긴 칼을 들여 보듯 다른 꿈을 품은 분위기가 칙칙한 직원을 견디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사장이 되지 말아야지. 자기 손님이 왔는데 남에게 커피 타오라고 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말아야지.  

 “걔 이별했대.” 화장실 하수구에 커피를 쏟아 버리는데 남자 직원 둘이서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듣게 된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 둘의 대화가 오간다. “왜? 엄청 오래 만났다던데?” “그러니까. 요즘에 그 누나 좀 미쳐 있잖아.” 

  오호, 생각할수록 탁월하게 유용한 핑계로군!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찾아와 “이별했어?” 물어온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명확한 건 누군가 나에게 찾아와 이별했냐고 물어온다면 아마 그렇다고 해도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음, 그런데 뭐랑 이별 했다고 해야 하는 거지?


     -“걔 이별 했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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