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빻지' 않은 그림을 그릴 것인가: 일러스트레이터의 슬픔과 기쁨

생각하다일러스트레이션

어떻게 '빻지' 않은 그림을 그릴 것인가: 일러스트레이터의 슬픔과 기쁨

이민

일러스트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늘 그려 왔고 그나마 제일 잘하는 것이고 계속 하게 되어도 스트레스를 좀 덜 받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핀치의 일러스트레이터 구인 광고는 좀 더 구미가 당겼다. 내 그림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웹사이트에 주기적으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마다 할 일러스트레이터가 있을까. 때 마침 몇몇 언론사 SNS계정에서 기사와 함께 올리는 자극적인 이미지에 지쳐있어서 나 같으면 저렇게 안 할텐데,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은근한 자신감에 차 있던 시기였다.

빻지 않으면서
전형적이지 않으면서
보기 괜찮게
만들어주세요

일러스트 이민

운이 좋아 핀치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신경쓸 것이 더 많았다. 남성이 저지른 범죄기사에 들어갈 이미지는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표현할 수 있는지, 심미적인 부분과 사회적으로 포용해야 할 이미지들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항상 젊은 여성과 남성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 일 수는 없었고 어린 여아와 남아를 표현하는 것에 있어 고정관념을 지우고 그리기, 소수자를 다루는 기사에서 전형적인 이미지를 피해가기… 나는 생각보다 모르는게 많았다. 초반에는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로 동료의 지적을 받고서야 문제를 자각한 적도 있고, 발행을 마친 글의 작업이 심미적으로 부족해서 밤새 자책한 적도 있다.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데다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작업인데 이왕이면 시각적으로도 좋으면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이미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나에게 주어진 작업시간은 짧은 편이다. 미대 입시 시험을 볼 때는 5시간의 시험 시간도 부족했는데 최소 8시간의 근무시간 안에서 2건 내지 4건의 글과 관련된 이미지를 만들려면 내가 더 하고 싶어도 시간 분배를 잘 해서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2시간 이내에 글 분량 하나의 이미지를 끝내야하고 부족해 보여도 완성의 느낌을 내면서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 3년째 같은 일을 하다 보니 꼼수만 늘어서 최소 노동 최고 효과를 외치며 작업하고 있는 꼴이지만 말이다. 시리즈 원고를 받으면 나름대로 결을 맞춰서 작업해야 하고 사이트 메인에서도 서로 잘 어울리는지 신경을 쓰면서 작업을 해야한다. 감사하게도 외부에서 도움을 주시는 일러스트레이터분이 계셔서 내 작업만으로 채워지는 단조로움은 피할 수 있어도 한사람의 작업이 대부분이라 스타일을 다양하게 한다고 해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나의 정신 상태에 따라서 시기 별 작업 느낌이 많이 달라서 분기 별로 비슷한 분위기를 낼 때도 있다. 유난히 밝은 색을 쓰는 시기가 있는 반면에, 블루 계열의 색만 쓸 때도 있고 무채색으로만 작업한 시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짧은 시간 안에 비교적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게 내 성향과 맞는 일이긴 했다. 그래도 작은 직사각형 안에서 새로운 구도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구도나 색감에 대한 고민을 길게 할 수는 없다. 하나의 그림을 붙잡고 고민하다 보면 정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을 하는게 중요했고 놓을 것은 빠르게 놓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야 한다. 여러 해 동안 작업하면서 난감했던 일도 있다. 범죄를 저지른 정치인 얼굴이라든가, 가해자의 얼굴을 그리는 게 가장 난감했다. 나는 시각이 예민하고 비위가 약해서 그런 작업이 제일 힘들었다. 그리는 사람도 힘든데 보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싶고 얼굴을 그리기는 해야겠고 특징이 없으면 누구를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을 것이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효과를 써 위기를 넘겼 던 것 같다.

매일 그리게 된다,
조금은 다른 풍경을

일러스트 이민

그림으로 생계가 유지된다는 점은 굉장한 일이다. 또 그만큼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창작을 하는 직업은 가면을 쓸 수도, 포장을 그럴 듯 하게 할 수도 없다. 작업자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작업자가 어떤 마음 상태로 작업에 임했는지 고스란히 알아볼 것이다. 성의가 들어갔는지, 고민을 충분히 했는지 카피를 하지는 않았는지 등이 여과 없이 묻어 난다. 얼마든지 꼬투리만 잡히면 수치스러워 질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내 작업을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사이트에 거는 일은 어느 정도의 뻔뻔함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했고 이제 나는 뻔뻔해지다 못해 철판이라도 깐 기분이다. 하지만 작업을 마치고 발행된 글과 이미지들을 확인하러 사이트를 들어가면 늘 새롭게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찾아낸다. 이미 퇴근했는데 그걸 붙잡고 있는 스스로가 미련하게 느껴지지만 다시 작업하고 수정을 해서 올린다. 그만큼의 긴장감이 있는 일이다. 최근에는 슬럼프에 빠졌다가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작업이 끝나고 나면 늘 후회스러워서 입시학원을 다시 다녀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매일 아침 작업해야 할 글을 읽으면 다시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핀치에 연재를 해주는 분들에 대한 애정 때문인걸까? 글을 읽고 나면 조금씩 힘이 난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림 그리기 싫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좋은 글을 써주신 작가님들과 동료 에디터분의 노고에 감명을 받아 스케치를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가끔 작가님들이 동료들을 통해서 전달해주시는 피드백도 엄청나게 힘이 된다. 적어도 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구나 하는 안심이 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세상에 참 많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을 고려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미디어에는 몸매 좋고 외모 좋은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만 나온다. 날씬한 여자는 더 날씬하게 근육질의 남성은 더 근육이 더 잘 보이게 부각되기도 한다. 머리가 짧은 근육질의 여자도 나올 수 있고, 머리가 긴 육감적인(?) 남자도 나올 수 있다. 다리가 없는 사람도 나올 수 있고 팔이 없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백발의 노인도 나올 수 있고, 갓 태어난 아이도 나올 수 있다. 용접하는 여성이 나올 수 있고, 네일 아트를 하는 남성이 나올 수도 있다. 장애가 없는 사람이 나올 수 있듯,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의 모습이 있고,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은 다양한 면을 보여줄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보기에 좋다고 편향된 것만 쫓다 보면 소외되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소비하기 이전에 같이 사는게 중요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늘도 아이패드 앞에 앉는다. 

<핀치>의 그림을 그리는 나의 원칙 5가지

  1. 다양한 사람의 몸을 그리자.
  2. 다양한 나이의 사람을 그리자.
  3. 사건 사고 기사를 다룰때는 가해자를 부각한다.
  4. 다채롭게 그리자.
  5. 웬만하면 고양이를 같이 그려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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