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아홉 살 때에 수술과 재활을 받느라 초등학교에 일 년 늦게 들어갔다. 부모님께서 내가 또래 비장애인들과 어울리며 교육도 잘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부모님의 말을 따랐다. 저학년 때는 특수반(장애 아이들을 위한 교실)과 비장애 아이들이 있는 교실을 번갈아가며 수업을 들었다.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와 어울리며 밝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런 날들만 지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고학년 말이 되자 타인이 심어 준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됐다. 친절했던 친구들은 사춘기를 겪으며,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하등한 서열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내 두 다리와 발이 되어 준 휠체어의 바퀴를 자신들의 발과 다리로 차며 고장내려 했다. 난생 처음으로 이름 세 글자 대신 ‘병신’, ‘장애인’이라고 불려졌다.
그때 스스로 내가 장애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장애인이라는 사실보다는 괴롭힘에 하루하루 불안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살았다. 내 휠체어, 나의 다리를 없애고 싶어한 친구들이 무서워졌다.
내 휠체어를 발로 차던 아이들, 세 명의 무리였나. 우리가 초등학교 졸업 후에 안 본 지 꽤 됐네. 물론 너희들은 자신의 행동이 기억 안 날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실수를 반복해서 다른 장애인들에게 악몽을 주지 않지? 꼭 그러길 바라.
학교 폭력은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악몽이다. 학교가 가해자들에게 확실한 처벌을,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지원해 주지 않는다면 또다른 악몽이 시작될 뿐이다. 비장애 아이들이 일찍부터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장애 아이들과 함께 잘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길 바란다. 장애 아이들도 비장애 아이들과 등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 어두운 시절에도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바로 컴퓨터.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을 잘하지 않아도 컴퓨터 안에서는 모두와 소통할 수 있었다. 한 커뮤니티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비장애인 언니와 친해졌다. 그 언니는 내가 힘든 나날을 보낼 때 처음으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본 사람이었다. 나는 언니에게 내가 장애인이며, 장애 때문에 학교 생활 중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털어 놨다. 그 언니는 제일 먼저 말해 줘서 고맙다고 하며, 항상 “장애라는 것 때문에 작아질 필요가 없어. 더 큰 사람이 돼서 원하는 것들 가져. 태어나 줘서, 건강히 있어 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고맙다니,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웠다. 가족을 제외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애정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 언니도 분명히 많이 어렸을 텐데, 그런 말들이 내게 고마웠고 소중했고 오래도록 못 잊을 말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 언니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와주며, 용기를 줄 수 있는 사회복지사의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언니와는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도 했다. 잊지 못할 추억이지만 어느 새 연락 안 된 지 너무 오래돼어 버렸다. 어디에서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과 연락이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언니, 그때는 내가 더 고마웠어. 나는 언니 덕분에 꿈의 의미를 알게 됐네. 낯선 사람에게도 애정을 느끼게 해 줘서 고마워. 이 말을 꼭 전해 주고 싶다.
네 번째, 초등학교 졸업 후에,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될까 두려워서 일부러 조금 먼 중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한 후 내 성격이 크게 변해 버리고, 비장애인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게 덜컥 겁이 났다. 특수반의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랑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던 시간이 편안했고,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청각장애특수학교나 전문계고등학교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학교 밖에서 알게 된 친구(내가 초등학교에 일 년 늦게 들어갔으니까 그 친구는 이미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연락 중이다.)가 내게 본인의 고등학교 생활 이야기를 해 줬고, 듣다 보니 처음으로 ‘와, 멋있다! 나도 여러 친구들이랑 같이 공부하고 싶어!’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우리 동네 인문계고등학교에 특수반이 없어서 또 삼 년 동안에 조금 멀지만, 다른 동네의 특수반이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다섯 번째,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문과가 됐고, 고등학교에서 가장 좋은 담임과 반 친구들이 있어서 밝게 지내며, 공부도 조금씩 흥미가 생겼다. 그러나....
학기 초, 수학여행 시기에 갑자기 집안 사정이 크게 터졌다. 항상 내 뒤를 맞춰 주시던 엄마께서 과로로 쓰러지셨고, 평생 혈액 투석을 받아야 하는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부모님도, 나도 참 크게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그런 사정을 함께 잘 견뎌 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아이들과 똑같이 공부하다가 수능을 쳤었는데, 대학교는 일반대학교가 아닌 사이버대학교를 선택했다. 주전공인 사회복지학과를 시작해서 공부하는데, 나중에는 넓은 세상을 조금 더 배우고 싶어서 복수전공인 한국어교육학과를 하게 되면서 두 전공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장애로 한국어교육학과의 모의 실습을 준비하던 도중 갑자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다다음 편에서 쓰겠다.)
난항에 맞서기 위한 과정에서 졸업이 미뤄지고 전공 관련 자격증도 동기들보다 늦게 신청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장애로 인한 장벽 앞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 중인 또 다른 장애 학생들을 위하여 넓은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갈 것이다.
유월의 이메일: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