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연속성을 도모하고 싶다

핀치 타래생활정보임신중단권페미니즘

삶의 연속성을 도모하고 싶다

상전보다 더 한 제 몸을 모시면서 살다보니

엘파바

한 달에 내가 나로 온전히 있을 수 있는 건 정말 넉넉히 쳐도 보름이었어요. 열흘 쯤은 호르몬의 아우성으로 정신이 사납고, 그 뒤 열흘 쯤은 몸을 거둬 돌보느라 정신이 없고. 

아 면생리대도 정말 오래 써봤어요. 그런데도 통증과 생리량은 호전 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일회용 생리대는 버리면 끝이지만, 면생리대를 쓰면 생리통과 체력 저하 등으로 힘든데 내가 사용한 생리대를 또 세탁도 해야하는 노동을 절대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좋은 점이 많지만 저를 돌보는데는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었어요. (말을 곱게 써서 그렇지 이미 성격 파탄의 시점인데 핏물 빼겠다고 담궈놓은 면 생리대를 보면 꼭지가 돌아버립니다…) 

호르몬과 생리의 폭풍이 다 지나가면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는 열흘 정도의 시간역시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시간은 쓸데없이 이런데선 공평하더라고요. 아파서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나, 흘러가버리는게 아까운 순간이나 일정한 속도로. 나로서 온전한 열흘은 의욕이 넘치면서도 서글퍼졌습니다. 이런 베스트 컨디션일 때는 너무나 집중력도 좋고 아이디어도 많고 의지력도 샘솟는데, 학업도 커리어도 연속성을 가지지 못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 

커리어 설계? 그게 뭐죠? 먹는건가요? 상전보다 더 한 제 몸을 모시면서 살다보니 목표를 세우고 달성을 하는 일은 하나도 못하고 그저 살아지는대로 삶을 살게 될 뿐이었습니다. 희망과 성취가 없는 나날을 살다보니 점점 우울의 정도도 심해져 갔고요. 

지겨웠어요. 사는 것 자체가 말이죠. 생리 때문에 삶의 연속성을 도모할 수 없는 게 한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런 시간이 겹겹이 쌓여서 정말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어 힘들어졌을 때, ‘이보다 최악은 없겠지’ 하고 미레나를 시술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처음 8개월 정도는 오히려 자궁출혈이 발생해서 시술 전보다 상황이 나빴어요. 결국 개인 산부인과에서는 안되더라고요. 전원 서류를 받고 대학병원에서 진료받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궁의 근종이었던지라, 미레나가 잘 작용하여 이 근종의 증상을 완화해주길 기다렸지만 결국 출혈만 더욱 심해져서 대학병원에서는 전신마취를 하고 근종 제거 수술을 하자고 하셨어요. 또 말하지만 뭐 이보다 최악이 또 있겠나… 하고 수술을 결심했고 시술된 미레나를 제거 >> 근종 제거 수술 >> 다시 새로운 미레나를 시술하기로 합니다. 2018년 6월이었어요. 

두 번째는 확실히 첫 번째와는 달랐어요. 일단 출혈량이 현저히 적었어요. 그래서 ‘아 첫번 째 보다는 호전되고 있긴 하구나' 하는 확신이 점차 들었습니다. 조금 안타깝게도 출혈 기간은 계속되긴 했어요. 아마 1년 쯤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하루에 소형 생리대 한 개면 충분할 정도로 출혈량이 아주 적어서 신경 쓰일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냥 거의 신경쓰지 않고 출퇴근이 가능한 정도였습니다. 체력 저하가 되어 힘들긴 했지만 생리 자체 때문에 힘든일은 (기존에 비하면) 0에 수렴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생산성 향상에 몰두 가능한 날이 한달에 10일 정도 밖에 되지 않다가 15일 쯤, 20일 쯤 늘어나니까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늘어나고 우울감도 많이 사라져 갔습니다. 성취감의 정점은 작년 여름이 지나고 나서에요. 두 번째 미레나를 시술하고 1년쯤 되었을 시점인데 물론 아직 출혈이 있긴 했지만 정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였던데다가 마침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제 연봉의 4배 수준의 매출을 기여하게 되었어요. 살면서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로 내 몸의 컨디션에 영향 받지 않고 성과를 낼 수 있게 되서 그 이후로는 정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긍정충이 되었습니다. (애초에 삶에 엄청 시니컬했던 사람) 

그러다보니 이런 간증 수준의 후기 또한 쓰겠다는 결심과 실행을 진행 중인거고요. 몇 년 전의 저와 비교하면 정말 다른 인격체 수준으로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둥그래졌어요. 스스로도 이런게 가능하구나, 싶어서 놀라울 정도고요. 

그런데 정말 모든 일은, 특히나 몸에 관련된 일은 사바사, 케바케기 때문에 저도 모두가 시술하고 광명 찾자! 고 부르짖는 건 아니에요. 미레나 시술에 대해서는 아직 덜 알려져있기 때문에 그저 조금이라도 제가 이 경험을 나누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SERIES

미레나 1패 1승

엘파바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13. 대화하는 검도..?

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이소리소

#검도 #운동
스스로를 돌이켜보기에, 다수의 취향을 좋아하는 데 소질이 없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예능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체온이 2~3도는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대화에 섞일 적당한 말이 뭐 있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던져보지만 진심이 없어서인지 어정쩡한 말만 튀어나온다. 결국 혼자 속으로 “난 만화가 더 좋아.."라며 돌아서는 식이다. 맛집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어째 운동 취향도 마이너한 듯하고.....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보장 중에 보장, 내 자리 보장!

이운

#방송 #여성
나는 땡땡이다. 아마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시간을 올인하고 있는 5천만 결정장애 국민들을 위한 해결 상담소로,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여 해결해 준다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방송이다. 그리고 ‘땡땡이’는 이 취지에 맞게, 사연자의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다 만들어진 애칭이다. 비밀보장 73회에서..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비건 페미 K-장녀 #1 가족의 생일

가족들과 외식은 다이나믹해지곤 한다

깨비짱나

#페미니즘 #비건
다음주 호적메이트의 생일이라고 이번주 일요일(오늘) 가족 외식을 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물밀듯이 내 머리속을 장악했지만 너무 상냥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일요일에 시간이 되겠냐고 오랜만에 외식 하자고 너도 먹을 거 있는 데로 가자고 묻는 말에 못이겨 흔쾌히 알겠다고 해버린 지난주의 나를 불러다가 파이트 떠서 흠씬 패버리고 싶은 주말이다. 이 시국에 외식하러 가자는 모부도 이해 안가지..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