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믿을 수 없는 안나 파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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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믿을 수 없는 안나 파퀸

선생님 10살에 그런 명연기를 하시면 어떡해요

솔티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는 단 한 순간도 눈과 귀를 뗄 수 없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19세기 중반 뉴질랜드로 중매 결혼을 오게 된 피아니스트 에이다가 자신의 피아노를 되찾고,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거치는 여정에는 인간의 모든 감정이 함축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음악과 표정과 수어로 표현하는 그 옆에는 항상 그의 딸 플로라가 있다.  

플로라를 본 순간 이 어린이와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왜 오천 명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이 역을 맡게 되었는지 이해가 됐다. 영화 초반에 어린이들 특유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그에게 눈길이 갔다면, 중반부터는 그의 연기에 넋이 나가게 된 것이다.  단순히 귀여운 아역이 아닌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조연으로 안나 파퀸은 그렇게 그의 생애 첫 번째 연기로 모두를 압도한다.

연기는 나이순이 아니다 - 안나 파퀸 (10세) (출처: imdb.com)
연기는 나이순이 아니다 - 안나 파퀸 (10세) (출처: imdb.com)

에이다는 어릴 때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구어를 사용하길 그만두었고,수어로 소통하는 그를 위해 플로라는 엄마의 통역사가 된다.  에이다가 단호한 표정으로 수어를 하면 플로라는 그 못지않게 인상을 쓰며 그 의미를 말로 전달한다. 에이다가 없는 자리에서는 "벙어리가 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까?"라는 사람들의 말에 "사실 사람들이 하는 대부분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대요."라고 대신 응수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애어른도 아닌 것이 자기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엄마에게 "진흙에 얼굴이나 박아라! 미친개한테나 물려라!"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화를 내는 아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마의 머리를 빗겨주며 서로 간지럼 태우면서 웃는 사랑도 화도 슬픔도 즐거움도 많은 아이이다. 

 영화 초반에 우리는 내레이션을 통해 에이다가 여섯 살 무렵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플로라에게선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에이다는 오페라 가수였으며 아빠와 산속에서 노래를 부르다 아빠가 번개에 맞아 횃불처럼 타올랐고 그 뒤로부터 엄마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그 후에 우리는 서로를 애정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빠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플로라를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플로라 혼자 상상한 이야기일까? 남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자고 엄마와 같이 꾸며낸 이야기일까? 우리는 둘 사이에 오간 수많은 대화,  다른 이들은 절대 들을 수 없는 엄마의 이야기를 먹고 자란 플로라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배를 타고 이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플로라는 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고,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말하며 엄마 치마폭에 붙어 경계 가득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엄마가 피아노 레슨을 하는 집에 같이 들어가지 못하게 해 문밖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판자 틈으로 엿보는 그 집 안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따라오지 말라며 자길 밀쳐내고 그 집으로 향하는 엄마를 보면서 언제서부터인가 플로라는 그를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플로라는 엄마가 시킨 심부름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배달한다. 이것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고 플로라는 어른들의 잔인함을 목격하게 된다. 어른들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의 심경이 이해하기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플로라는 다시 한번 알려준다. 

플로라 너의 머릿속이 궁금해 (출처: movie.naver.com)
플로라 너의 머릿속이 궁금해 (출처: movie.naver.com)

영화 속의 많은 아이들은 사랑스러움을 담당하며 가끔 명쾌하고 순수한 통찰의 한마디를 던져 어른들에게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현자의 역할을 하곤 한다. 플로라는 어째서인지 그 모든 것을 하면서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인물인 듯 하다. 그를 보면서 어린이가 주인공이 아닌 영화에서 인형도 아니고 어른들의 각성 스위치도 아닌,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내는 아역을 다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드문 배역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살려낸 그에게 그해 오스카 여우조연상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낯선 뉴질랜드의 숲속,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 그 질척이는 진흙탕 속에서 안나 파퀸의 플로라는 눈이 부시게 빛난다.

p.s. 비가 내리는 날 플로라는 마루 밑에 숨은 개를 막대기로 찌르면서 냄새나니까 밖으로 나와서 샤워하라며 괴롭힌다. 그리고 다음 씬에선 "어떤 못된 사람이 너를 막대기로 쑤셨니, 내가 아껴줄게"라며 개를 부둥켜안는다. 지킬과 하이드 뺨치는 플로라가 너무나 좋아서 이 장면을 열 번은 돌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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