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도둑맞은 포피는 자전거와 작별 인사도 못 했다며 아쉬워한다. 처음 간 서점에서 주인에게 자꾸 말을 걸고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하며 서점을 나서고, 한밤중 으슥한 곳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부랑자에게 대화를 건넨다. 무채색의 옷은 절대 입지 않는 포피는 결코 나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다. 현대인에겐 불가능할 정도의 선함을 가진 이 인물과 두시간을 보내고 나면 세상에 그와 같은 사람이 좀 더 많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happy-go-lucky' 는 '태평스러운, 낙천적인, 되는 대로 운에 맡기는'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현신과도 같은 포피는 초반엔 다소 철없어 보이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순진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일상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포피가 장난과 진지함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누구보다도 여유 있게 삶을 살아가는, 단 한 순간도 가식 없는 매사에 진심인 사람임을 깨닫는다.
초등학생 교사인 그는 친구들과 밤새워 놀고 다음 날 교구를 챙겨 학교로 가서 철새들에 대해 가르친다. 학교가 끝나면 트램펄린장에 가서 방방 뛰어오르며 운동을 한다. 그러다 허리를 다쳐 치료를 받고 트램펄린을 못 하니 플라멩코를 배우러 간다. 학교에 문제아가 생겨 그를 보살펴주고 그 아이의 가정 상황을 살펴봐 줄 사회복지사와 마음이 맞아 데이트도 한다. 인종차별적이고 다문화주의를 반대하면서 화를 내는 강사에게 운전을 배우며 어쩌면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에 시달렸을지도 모를 그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모든 시도가 항상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포피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그렇게 흘러가는 삶에 맞춰 살아간다.
삶의 찌듦이 전혀 없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보며 우리는 어느 순간 그에게 이끌리게 된다. 샐리 호킨스가 보여주는 선함의 힘이 그런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쁨을 담아 웃다가도 순식간에 진지하게 상대를 바라보며, 그를 걱정하면서도 절대 그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없다. 실없는 농담을 내뱉다가도 "그래요, 알아요" 하는 포피의 표정과 말투에는 전에 없던 힘이 실린다. 투명한 유리 같은 그의 얼굴에는 가식 없는 연민과 동정, 상대를 향한 애정과 믿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샐리 호킨스는 포피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올곧게 선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필요한지 이야기한다. 그 선함이 유약한 자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때때로 얼마나 단단하고 강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진심으로 선함을 믿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의 힘을 믿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쿨'해야한다는 생각에, '착하면 지는 거다'라는 생각에, 순진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차갑고 냉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어적이고 회의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 역시 그러다가도 꿋꿋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포피를 떠올리면 내가 부정하던 친절과 긍정과 믿음의 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계산하고 의심하기 전에 그냥 믿어보는 것, 가식 대신 진심을 내보이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선택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포피의 철없어 보이는 낙관주의는 오히려 더 성숙한 삶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는 실없이 웃는 것이 아니라 삶을 굴곡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좀 진지하게 미래를 대비해서 살라는 동생의 말에 "난 지금 내 인생이 좋아. 가끔 힘들기도 한데 그게 인생이잖아."라는 대답. 친구가 포피에게 너는 좀 덜 친절해질 필요가 있다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 포피는 다시 한번 "노력해서 나쁠 것은 없잖아"라고 말한다. 이렇게 뻔하디 뻔한 대사의 퇴색된 의미를 되살려내서 그 말의 진심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이 허구적인 인물을 진정성으로 살려낸 샐리 호킨스가 가진 힘일 것이다.
나는 "이 배우가 아니면 못해낼 연기"에 회의적이다. 세상은 넓고 훌륭한 배우는 넘쳐나기 때문에. 그런데 <해피 고 럭키>의 포피를 생각하면 종종 그 생각에 금이 간다. 이건 샐리 호킨스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은 인물이고, 샐리 호킨스만이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