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발버둥 치고 결국에는 한 걸음 나아가는 여정에 대리만족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기 때문에 나는 중독된 것처럼 성장 영화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홧김에 집을 나가고 밤 중에 친구들과 모여 대마를 피우고, 첫 경험에 목이 말라 아무나 붙잡아서 자고, 대륙을 건너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수많은 미국 성장 영화의 청소년들을 보며 타고나길 내향적이고 반-반항적인 나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그들을 이해해왔다.
코고나다 감독의 <콜럼버스>는 내가 애써 머리로 이해하지 않아도, 단번에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성장 영화이다. 주인공 케이시는 누구나 다 알아볼 만한 특별한 재능이 있지도,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원대한 포부도 없다. 악을 쓰고 몸부림을 치며 무엇인가를 원하는 사람도 아니다. 자고 나란 동네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엄마를 일터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가끔 동네에서 열리는 건축 강연에 가는 것이 낙인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다.
동네 사람들은 현대 건축의 메카인 콜럼버스에 살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다. 케이시만 혼자 언젠가 이 동네의 건축 가이드가 될 것을 생각하며 각 건물의 특징을 혼자 읊어볼 뿐이다. 질 나쁜 남자들에 시달리는 엄마를 홀로 기다리며 건물들을 바라보았고 어느샌가 케이시는 그 건물들을, 그 동네를, 자신의 삶을 마음에 고스란히 품게 되었다.
엄마가 다시 회복되어 둘이 무탈하게 지내고 있을 무렵 도시에 온 이방인 진을 통해 우리는 케이시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엄마가 삶을 놓아버렸을 때 둘의 인생이 얼마나 바닥을 찍었는지에 대해, 좋아하는 건축가가 건넨 배움의 기회를 왜 저버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왜 이 동네와 그 집과 엄마를 떠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러나 케이시는 말을 하다가도 눈물을 흘리다가도 금세 멋쩍은 웃음으로 그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다며 말을 돌린다. 영화는 그의 생각을 쉽게 펼쳐 보이지 않는 대신, 그의 침묵과 눈물과 미소를 지켜보며 그가 흘리는 수많은 감정을 보여준다.
벽 대신 유리창이 길게 늘어선 이 건물을 좋아하는 이유, 졸업한 학교를 거닐며 그가 진에게 해준 이야기, 그의 속마음과 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케이시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처음으로 표현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의 도움으로 케이시는 처음으로 용기를 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고, 엄마와 나의 미래가 아닌 나만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이기적인 선택을 해본다. 마음의 짐이 무거웠던 케이시는 그 늦고 더딘 날갯짓마저도 기대가 아닌 미안함을 느끼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케이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와 닮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훌쩍 떠날 수 없었던 사람. 그런 사람도 용기를 내어 기회를 잡기로 선택하면 된다는 것을, 슬프고 두렵지만 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케이시를 보며 다시금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