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케이시를 응원해

핀치 타래영화여성서사리뷰

<콜럼버스>의 케이시를 응원해

훌쩍 떠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솔티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발버둥 치고 결국에는 한 걸음 나아가는 여정에 대리만족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기 때문에 나는 중독된 것처럼 성장 영화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홧김에 집을 나가고 밤 중에 친구들과 모여 대마를 피우고, 첫 경험에 목이 말라 아무나 붙잡아서 자고, 대륙을 건너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수많은 미국 성장 영화의 청소년들을 보며 타고나길 내향적이고 반-반항적인 나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그들을 이해해왔다.  

코고나다 감독의 <콜럼버스>는 내가 애써 머리로 이해하지 않아도, 단번에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성장 영화이다. 주인공 케이시는 누구나 다 알아볼 만한 특별한 재능이 있지도,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원대한 포부도 없다. 악을 쓰고 몸부림을 치며 무엇인가를 원하는 사람도 아니다. 자고 나란 동네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엄마를 일터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가끔 동네에서 열리는 건축 강연에 가는 것이 낙인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다.

조용한 여름밤 건물을 바라보던 케이시 (출처: movie.naver.com)
조용한 여름밤 건물을 바라보던 케이시 (출처: movie.naver.com)

동네 사람들은 현대 건축의 메카인 콜럼버스에 살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다. 케이시만 혼자 언젠가 이 동네의 건축 가이드가 될 것을 생각하며 각 건물의 특징을 혼자 읊어볼 뿐이다. 질 나쁜 남자들에 시달리는 엄마를 홀로 기다리며 건물들을 바라보았고 어느샌가 케이시는 그 건물들을, 그 동네를, 자신의 삶을 마음에 고스란히 품게 되었다.    

엄마가 다시 회복되어 둘이 무탈하게 지내고 있을 무렵 도시에 온 이방인 진을 통해 우리는 케이시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엄마가 삶을 놓아버렸을 때 둘의 인생이 얼마나 바닥을 찍었는지에 대해, 좋아하는 건축가가 건넨 배움의 기회를 왜 저버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왜 이 동네와 그 집과 엄마를 떠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러나 케이시는 말을 하다가도 눈물을 흘리다가도 금세 멋쩍은 웃음으로 그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다며 말을 돌린다. 영화는 그의 생각을 쉽게 펼쳐 보이지 않는 대신, 그의 침묵과 눈물과 미소를 지켜보며 그가 흘리는 수많은 감정을 보여준다.
벽 대신 유리창이 길게 늘어선 이 건물을 좋아하는 이유, 졸업한 학교를 거닐며 그가 진에게 해준 이야기, 그의 속마음과 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케이시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처음으로 표현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케이시가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 돌아왔으면 (출처: imdb.com)
케이시가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 돌아왔으면 (출처: imdb.com)

진의 도움으로 케이시는 처음으로 용기를 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고, 엄마와 나의 미래가 아닌 나만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이기적인 선택을 해본다. 마음의 짐이 무거웠던  케이시는 그 늦고 더딘 날갯짓마저도 기대가 아닌 미안함을 느끼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케이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와 닮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훌쩍 떠날 수 없었던 사람. 그런 사람도 용기를 내어 기회를 잡기로 선택하면 된다는 것을,  슬프고 두렵지만 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케이시를 보며 다시금 떠올린다. 


SERIES

무조건 반드시 주인공

솔티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오늘도 결국 살아냈다 1

매일매일 사라지고 싶은 사람의 기록

차오름

#심리 #우울
하필 이 시기에 고3으로 태어난 나는 , 우울증과 공황발작으로 많이 불안해진 나는, 대견하게도 오늘 하루도 잘 버텨냈다. 우울증과 공황발작이 시작된 건 중3. 하지만 부모는 어떤 말을 해도 정신과는 데려가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20살이 되고 알바를 하면 첫 번째로 갈 장소를 정신과로 정한 이유이다. 부디 그때가 되면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지면서. 부모는 우울증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13. 대화하는 검도..?

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이소리소

#검도 #운동
스스로를 돌이켜보기에, 다수의 취향을 좋아하는 데 소질이 없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예능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체온이 2~3도는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대화에 섞일 적당한 말이 뭐 있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던져보지만 진심이 없어서인지 어정쩡한 말만 튀어나온다. 결국 혼자 속으로 “난 만화가 더 좋아.."라며 돌아서는 식이다. 맛집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어째 운동 취향도 마이너한 듯하고.....

4. Mit Partnerin

여성 파트너와 함께

맥주-

#여성서사 #퀴어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이성애 규범과 그 역할에 익숙해진 내가, 동성애를 하기 위한 일련의 역할들과 그 수행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실용적-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기능에 충실한-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사회에서 ‘여성적’ 이라고 해석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하늘하고, 레이스나 프릴이 달려 있고, 패턴이 화려한 옷들. 재미있는 것은 패턴..

비건 페미 K-장녀 #1 가족의 생일

가족들과 외식은 다이나믹해지곤 한다

깨비짱나

#페미니즘 #비건
다음주 호적메이트의 생일이라고 이번주 일요일(오늘) 가족 외식을 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물밀듯이 내 머리속을 장악했지만 너무 상냥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일요일에 시간이 되겠냐고 오랜만에 외식 하자고 너도 먹을 거 있는 데로 가자고 묻는 말에 못이겨 흔쾌히 알겠다고 해버린 지난주의 나를 불러다가 파이트 떠서 흠씬 패버리고 싶은 주말이다. 이 시국에 외식하러 가자는 모부도 이해 안가지..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