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지난 세달 동안 말한 횟수가 태어나서 세달 전까지 말한 총 횟수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아니 진짜로 최근까지 인생을 통틀어 ‘못하겠다’는 말을 제대로 해본 적이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런 낯설었던 말을 요즘 밥먹듯이 하고 있는데, 이유는 1. 진짜 못할 게 눈에 보여서 2. 못하겠다고 말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으면 다시 폭주기관차가 달릴 것임을 알기 때문에. 덕분에 약속도 마감도 중요한 계획도 당분간은 전부 ‘못하겠습니다’가 되었다.
저 숨을 좀 쉬고 싶어요
사실 이 시리즈의 처음 기획은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겪은 번아웃을 시간 순서대로 쭉 훑어가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저께 프롤로그를 올리고 나서 거짓말 안하고 48시간 내내 적잖은 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 힘들었던 시간을 자세히 뜯어보고 어떻게 힘들었는지 왜 힘들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초-중-고까지 훑어보고 나서 벌써 숨이 막혀 죽을 거 같았다. 나 어떻게 이렇게 살았지. 지금 생각하면 진짜 인권침해에 폭력이 난무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았는데, 대충 묻어왔던 기억이 수면 위로 한꺼번에 올라오니 숨이 너무 가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해야겠다. 못하겠습니다. 저 숨을 좀 쉬고 싶어요.
어디 기획서를 제출한 것도 아니고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닌데 혼자 맘대로 쓰는 글 하나 써 놓고 원래 계획대로 못 쓰겠다고 말하는 게 왜 그리 어려운지 의아할 수 있다. 나도 의아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소심한 선언은 내 개인적 성장의 찬란한 증거다. 이전 같았으면 1. 계획대로 글이 나올 때까지 정신을 쥐어짜고 또 쥐어짜서 결국엔 밤을 새거나 해서 완벽하게 원래 계획에 부합하는 글을 간신히 써내고 기절하거나, 2. 처음부터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린 이런 어그러진(?) 시리즈는 차라리 버리는 게 나아! 라며 비장하게 내치고 다른 기획에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3. 앞의 두 과정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여 눈물을 훔치며 타래 베타테스터 활동을 접거나. (글 하나 쓰고?) 진짜 웃기지. 웃기는 거 안다. 웃기는 거 알면서도 48시간을 고민한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면서. 세 가지 선택지를 백번 왔다갔다 하면서. 이건 그냥 고장난 거다.
'못하겠습니다' = healing spell (Lv. 99)
‘못하겠습니다’는 고장난 번아웃 인간을 수리하는 마법의 주문이지만, 발동까지는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한 마디면 되는데. 그게 너무너무 어렵고 무서워서 온갖 고생을 사서 했다. 일주일 과제 7개에 진급시험 졸업시험까지 있었던 대학원 2년 동안 우울증으로 한참 고생하면서도 단 한번을 제외하고 모든 수업에 참석했다. 그 한번도 심지어 조퇴였다. 개인 사정 같은 건 감히 마감이라는 ‘절대 가치’를 훼손하기엔 너무나 하찮은 것이어서 나는 갑작스런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삼일도 안 되어 아무일 없었다는 듯 일에 복귀했고, 외할머니 장례식장 테이블 맨 구석자리에 상복을 입고 앉아서 누가 왔다 가는지도 모르고 노트북에 고개를 쳐박고 있었다. 같이 일하던 분이 내가 낑낑대는 걸 보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니, 사람이 아픈 날도 있고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마감을 미룰 수도 있는 거지.” 나는 충격에 새하얗게 질렸다. “마감을 미룰 수가 있다구요?”
누가 그렇게까지 하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죽을 힘으로 버텼다고 해서 늘 대단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알아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오히려 ‘아 쟤는 저렇게 달리는 애구나’ '시키니까 다 하네' 싶어서 일만 점점 더 많이 얹어줬다. 누가 내 고생을 알아준다 해도 내 몸과 마음의 절대적 피로가 덜어지는 건 아니어서, 결국 가장 무책임한 형태로 끝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책임감에 몸부림친 결과가 가장 무책임한 인간이 되는 거라니. 땅을 치게 억울한데 원망할 사람이 없다.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까지 무리하라고 요구한 적 없다. 날 그 지경으로 몰아간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
아무튼 지금부턴 이곳에 연대기도 없고 꽉 짜여진 기획도 없이, 그때그때 번아웃에 대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거다. 그러다 못하겠으면 또 못하겠습니다! 하고 또 다른 걸 쓰려 한다. 아. 숨이 좀 쉬어지는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이게 제일 중요하다. 숨 쉬는 거. 사는 거. 지쳐서 끝내버리는 대신 살아서 이어가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