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는 나는 얼마짜리지

핀치 타래

아무것도 안 하는 나는 얼마짜리지

나는 그냥 사람인 것도 같은데.

하뮤

아무것도 못 하겠다.  

정확히 말하면 쓸모 있는 활동을 아무것도 못 한다. 일이라든지, 글을 쓴다든지, 잡초처럼 방치된 머리를 다듬으러 간다든지, 보면 공부가 될 것 같은 영화를 보러 간다든지, 그런 거.  

오로지 생명 유지만을 위한 활동 중이다. 숨쉬고 눈을 깜빡거린다. 먹고 싸고 씻는다. 최소한의 사회적 욕구를 해소하려고 연락을 하거나 약속을 잡는다. 나머지 시간은 전부 자고 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힘이 꽤 많이 들어요, 라고 누가 그랬다. 예전에 스폰지 같은 프로그램에서 봤던 것 같다. 한 시간 동안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구는 달리고, 누구는 독서를 하고, 누구는 정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도록 했다. 그런데 가만히 있었던 사람의 칼로리 소비량이 독서를 한 사람과 비슷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치면 맞는 말이지만.  

칼로리 소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것보다 무기력의 문제. 그리고 쓸모 없는 내가 가치 없게 느껴진다는 문제.   

장부를 펴 놓은 것 같다. 회사 재무제표처럼. 이번달에는 이만큼의 생산을 했고 이만큼의 소비를 해서 총 창출한 에너지 및 재화 양이 이렇고, 총 수익은 이러합니다. 지난달에 비해 얼마만큼 상승했고 최근 5년간 경향을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대체 누구에게 보고하고 있는 걸까? 나를 산 사람이 누구길래? 

 세상이 나와 나의 활동에 가격표를 붙이는 건 익숙하다. 웰컴 투 자본주의 월드. 우리 모두 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모르는 사이 내가 나 자신에 가격표를 정성스레 붙이고 있는 걸 깨달으면 항상 느낌이 이상하다. 이건 아니지 않나. 내가 나한테 이래도 되나. 다른 사람들의 가격표를 무시할 수만은 없잖아. 물론 그렇지. 

그런데 아주 얇은 칼로 조금씩 살이 벗겨져 천천히 고깃덩어리가 되는 느낌이 든다. 불안하고 무서워서 미치겠다. 내가 나를 물건 취급하는 느낌은 그렇다. 

세상 모두가 내게 가격표를 붙이더라도, 나는 절대로 나에게만큼은. 부모님마저 내게 투자 수익을 기대한다고 해도, 계속 싸우면서. 가격표와 상관 없는 날 찾기 위해서, 마음 깊은 곳까지 헤치고 내려가서. 내게 가치가 있다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해도, 다 망해도 나는 아직 사람이라고. 그렇게 계속 계속 말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이렇게 지치나 보다. 마음 속으로 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어서. 비생산적인 나를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냥 사람인 나를 변호하느라. 

 힘든 싸움이다. 힘들다. 

하뮤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오늘도 결국 살아냈다 1

매일매일 사라지고 싶은 사람의 기록

차오름

#심리 #우울
하필 이 시기에 고3으로 태어난 나는 , 우울증과 공황발작으로 많이 불안해진 나는, 대견하게도 오늘 하루도 잘 버텨냈다. 우울증과 공황발작이 시작된 건 중3. 하지만 부모는 어떤 말을 해도 정신과는 데려가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20살이 되고 알바를 하면 첫 번째로 갈 장소를 정신과로 정한 이유이다. 부디 그때가 되면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지면서. 부모는 우울증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