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재난 같은 연애를 마치고 뻗었다. 애인은 내가 일하는 걸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시간과 정성을 자신의 욕구 – 친밀감이든 성욕이든 – 충족이 아닌 다른 곳에 쏟는 걸 못마땅해했다. 선을 그으려 몹시 노력했지만, 일할 때마다 연인에게 비난받는 상황에서 죄책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고, 일하는 시간은 점점 줄었다. 결국 ‘네가 나를 외롭게 해서 다른 사람이랑 잤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쓰레기 같은 인간과 헤어지고 나서 내게 남은 건 분노, 절망, 우울, 지친 몸, 빈 통장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마지막 상황을 가장 참을 수 없었다.
일이 나를 구원할 거야
부모님과 오랜 갈등을 겪고 있던 나에겐 부모님이 침입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숨쉬는 것만큼 중요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자리와 생활비가 언제나 갈급했다. 남은 잔고를 세고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두달을 못 버틸 것 같았다. 이미 여러번의 번아웃을 겪은 몸은 위험을 감지하고 ‘너 지금 일할 때 아니야’라고 소리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렇듯 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너무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때라 차라리 직장을 구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사람들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게 훨씬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 어째서 나는 일을 변호할 때만 이렇게 능수능란한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몸: 힘들어.
나: 언제까지 힘들 건데. 언제가 됐든 일어나야지.
몸: 시간이 더 필요해. 많이 힘들었단 말이야.
나: 네 사정은 잘 알겠지만, 우리 지금 돈이 없어. 어차피 지금은 불안해서 마음 편히 제대로 쉬지도 못하잖아. 우리 돈 조금만 벌고 쉬자.
몸: 아니 나 근데 진짜 일어날 수가 없다니까.
나: 너 가만 보면 맨날 약한 소리만 하더라. 너만 아파? 세상에 너 혼자 힘들어? 다른 사람들도 힘든데 다 악착같이 사는 거 안 보여? 너는 맨날 아프고 힘들어서 어쩌려고 그래 도대체?
몸: …
나: 괜찮을 거야. 이번엔 진짜 괜찮아. 이럴 때일수록 움직여야지. 사람이 생산적으로 살아야 활기도 더 생기고 하는 거야. 자, 내가 우리를 위해서 일자리를 구해 왔어. 내일부터 출근이야. 일어나. 얼른.
몸한테 너무 미안하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렇게 내가 나를 위해 구해온 일자리는 최악이었다. 급한 마음으로 구했으니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의 분량은 항상 넘치도록 많았고, 매일매일이 데드라인이라 출근부터 퇴근까지 엄청난 긴장 속에서 일했다. 게다가 업무가 단계별로 분배되어 있어서, 내가 일을 10분 늦게 하면 그 다음 단계 사람의 퇴근이 10분 늦어지는 구조였다. 작업을 업로드하면 즉각 업로드한 시간과 작업량, 작업자 이름을 공유 스프레드시트에 적었다. 어떤 작업자가 가장 빨리 일하는지, 어떤 작업자가 다음 단계의 작업자를 제일 많이 기다리게 했는지 쓱 보기만 해도 다 알 수 있었다. 나는 후자가 되지 않기 위해 공포에 떨며 일했다. 그렇게 일해서 받은 급료는 시급으로 치면 맥도날드 알바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 회사에서 5개월을 일했다. 시작할 때부터 지친 상태로.
몸은 처음엔 괴로움을 호소하다가, 말도 안되는 혹사에 부딪치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차라리 그게 고마웠다. 피로에 익숙해졌다. 연애로 상처난 마음도 더 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다. 모든 것에 무뎌졌다. 하루종일 울지도 웃지도 않고 아침에 일어나 한시간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갔다. 가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일만 했다. 일하고 나면 너무 지쳐서 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강력한 진통 효과에 돈까지 따라오다니 일석이조 아니냐고, 지인에게 웃으며 말한 적도 있다.
진통의 맛
그러니까 사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당장 생활비가 없는 게 아니었다. 물론 경제적 독립은 지금도 내게 몹시 중요한 문제고,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혹사를 거듭 강요하면서 뭘 얻고자 했는지 돌이켜보면, 그건 항상 ‘진통’이었다.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이유는 매운 맛의 고통으로 다른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나도 그랬다. 고통을 잊기 위해 새로운 고통이 필요했다. 원래 있었던 고통이 더 심할수록, 그걸 덮는 고통도 더 악독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플 때 항상 더 죽도록 일했다. 마침 생활비라는 좋은 핑계도 있으니 자신과 타인에게 둘러대기도 너무 쉬웠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는 과로가 미덕이고.
있을 때 잘하자
뭐가 날 낫게 하는지, 몸이 진짜 필요로 하는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나는 몸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된 지금에서야 겨우 가만히 앉아서 하나씩 어렵게 배워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도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더 이상 참지 않는 몸은 즉각 반응하고, 나는 안 앓아도 될 삼일을 더 앓으면서 또 가만히 듣는다. 그래. 힘들구나. 알겠어. 더 조심할게. 생산적이지 않은 나를 자책할 겨를도,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의 욕구 충족을 내 소중한 몸보다 더 우선시할 여유도 없다. 내가 몸을 버리면, 몸도 나를 버린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 몸에게 마지막 경고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돈이나 진통 같은 미련한 이유에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이 경고를 마음에 깊게 심을 거다. 몸과 내가 함께 살아가는 마지막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