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뭐해?’ 라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이 묻는다. 그냥 ‘잘 쉬고 있어요’ ‘잘 먹고 잘 자요’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왠지 대단한 ‘퇴사 후 일일계획표’를 써서 제출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취미 면에서는 이런이런 활동을 하고 있고, 자기계발 쪽에서는 이러이러하며, 책은 몇 권이나 읽었고(한 권도 안 읽었다.) 운동은 뭘 하고 있고, 향후 돈벌이 계획은 이렇습니다.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저 중에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가끔 미드나 보면서 잠만 하루에 열세시간씩 자고 있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날 인간쓰레기 취급할 것만 같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쉬는 게 뭐죠
제대로 일할 줄 모른다는 말에는 제대로 쉴 줄 모른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제대로 일하려면 반드시 잘 쉬는 법을 알아야 하니까. 해로운 일 습관을 가진 나는 당연히 쉬는 법을 까맣게 모른다. 주로 번아웃-퇴직 이후 나의 생활은 다음의 4단계를 거친다.
1단계: 퇴직 직후. 그동안 못 잤던 잠을 자고, 제대로 못 챙겨 먹었던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못 봤던 매체들을 몰아본다. 이때가 제일 행복하다. 퇴직한지 얼마 안 돼서 ‘이정도는 해도 돼!’라는 마음이 아직 생생할 때라 뭘 해도 죄책감이 없다. 아. 그래. 내가 침대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낮잠을 얼마나. 한낮에 맥주 마시면서 유튜브 마라톤 하는 이 느낌을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가. 일분 일초가 달콤해 죽겠다. 이때 누가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보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살 것 같다’고 대답한다.
2단계: 2주~3주 후. 슬슬 유튜브도 잠도 지겨워진다. 그래도 아직은 금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유가 있을 때라 크게 초조하진 않다. 이때부터 사람들과 약속을 잡는다. 오래 못 봤던 사람들과 밀린 수다를 떨고 컨디션이 안 좋아 미뤘던 술자리도 갖는다. 온갖 문화생활도 한다. 공연장, 영화관, 전시장을 들락날락한다. 평일 낮에 한강으로 산책을 간다거나 카페에서 책을 마음껏 읽는 사치를 맘껏 누린다. 나를 잘 챙기고 잘 쉬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3단계: 한달 이후. 2단계 때 약속과 문화생활 등으로 돈을 열심히 쓰고 나니 잔고가 빠듯하다. 퇴직 때 느꼈던 자유와 해방감은 희미해졌다. 엄마가 슬슬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라고 묻는다. 만날 사람들도 다 만났다. 먹고 놀아서 살이 찐다. 더 불안하다. 뭐라도 매일매일 하는 일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일은 하기 싫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운동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다짐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자며 완전히 박살난 수면 사이클과 편안함에 익숙해진 몸 때문에 강제성 없이 뭔가를 하기가 너무 힘들다. 돈을 아끼기 위해 밖에 나가는 빈도를 줄인다. 시간을 보내려 잠을 잔다.
4단계: 두달 이후. 집에 있는게 견딜 수 없어진다. 아껴 썼는데도 돈은 이제 바닥이 났다. 잠만 자는 무기력한 내 모습이 너무 싫다. 매일매일 불안감이 커진다. 그냥 훑어만 보려고 구직 사이트에 들어간다. 대충 어느 정도의 월급이 들어온다고 상상하니 메마른 마음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다. 어차피 지금 일할 건 아니니까, 생각하며 몇 군데 만만한 곳에 지원서를 넣는다. 운 좋게 채용과정이 진행될 때쯤엔 이미 진심을 다해 임하고 있다. 면접을 보고 나와서, 아차, 싶다. 나 지금 마음 상태도 안 좋고 체력도 하나도 없는데. 지금 일 시작하면 또 같은 끝일 거야. 못하겠다고 하자. 만약에 만약에 나 뽑아준다고 하면, 그러면 못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거야. 합격 통보를 받는다. 그동안 게으른 생활을 하며 느꼈던 자기 혐오가 싹 가신다. 고민한다. 온갖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설득한다(3화 참조). 출근한다.
지금 나는 3단계 후반, 4단계 초반 즈음에 있다. 매일매일 잠만 잔다. 게을러 빠졌다고 은근히 자책하고 있으니 남이 무심코 안부를 물어도 혼자 압박감에 진땀을 흘린다. 이러다 돈 떨어지면 얄짤 없다. 아니라고 도리질치면서 결국 또다른 출근의 길로 가는 거다. 이번엔 정말로 정말로 그러기 싫은데.
퇴사 후 일일계획표 짜기
같은 패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이 보기에 바람직한 시간표가 아니라 내 생활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시간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오늘 들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일상의 중심을 잡는 루틴을 만들어 나가고, 그 사이사이에 운동이나 가벼운 일을 쪼개 넣는 거다. 직업인 7년차인데 아직도 작은 루틴 하나 없다니. 그동안 일과 무(無)만 반복하며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건지 새삼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야. 나는 지금 건강, 더 나아가 생존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노는 것과 쉬는 것과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의 차이를 배울 수 있기를. 일의 유혹에 맞서 싸울 만한 생활의 가닥을 잡아낼 수 있기를. 이번엔 정말 4단계의 끝을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