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핀치 타래커리어정신건강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하뮤




일했다. 정말 밥만 먹고 잠만 자고 일만 했다. 독감인데 병원 갈 틈도 없이 네시간마다 타이레놀을 먹으면서 근무했다. 잠에서 깰 정도의 생리통에 배를 붙잡고 뒹굴면서도 진통제 한 팩을 다 비우며 일했다. 위염이 와도, 장염이 와도, 위염과 장염이 한꺼번에 와도 일했다.

전날도 멀쩡하게 출근했던 화요일 아침, 택시를 타고 회사에 갔다. 못 하겠다고, 못 하겠다고 엉엉 울었다. 백번도 더 그려본 퇴사는 그냥 그렇게 자동으로 됐다.  

본격적으로 앓아누웠다. 처음엔 과호흡이 왔다. 그러다 공황이 왔다. 밖에 나가려면 먼저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켜야 했다. 면역력이 0이 되었다. 10분만 나갔다 와도 아팠다. 괜찮아졌을까 싶어서 외출하면 아프고, 괜찮겠지 싶어서 공연을 보러 가면 공황이 재발했다.  


이상이 최근 일곱 달에 걸친 나의 격무와 번아웃의 전모다. 뼈에 박힌 깨달음이 하나 남았다. 아, 사람이 일하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진짜 짜증나는 건 이 번아웃이 내 첫 번아웃이 아니라는 거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다. 도대체 왜, 고생고생 해봤으면서 왜, 이젠 알 때도 된 인간이 대체 왜. 정신을 차리면 또 폭주기관차처럼 달리고 있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면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고장 난 병자가 돼서 방에서 못 나가고 있나. 취직과 격무와 퇴사와 기절과 취직의 사이클을 알차게 반복하면서. 난 그냥 큰 욕심 없이 월세 내고 전기세 내고 내 입에 풀칠하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3년 전 격무 완료 - 번아웃 초입. 박스 두 개를 꽉꽉 채운 서류를 3개월동안 작성했다.
3년 전 격무 완료 - 번아웃 초입. 박스 두 개를 꽉꽉 채운 서류를 3개월동안 작성했다.

 

뭔가 잘못돼도 아주 크게 잘못됐다. 운이 나빴다거나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이제 설명이 되지 않는다. 6개월간 여섯시 땡 하면 퇴근했으니, 여기엔 분명히 몸의 문제를 넘어서는 뭔가가 있는 거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짚어봐야 한다. 정신이 맑을 때. 폭주기관차가 또 달리기 전에. 진짜로 일하다 죽어버리기 전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멀리 돌아본다. 태초에 첫 번아웃이 있었다. 그래, 거기부터다. 

SERIES

번아웃의 역사

하뮤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비건 페미 K-장녀 #1 가족의 생일

가족들과 외식은 다이나믹해지곤 한다

깨비짱나

#페미니즘 #비건
다음주 호적메이트의 생일이라고 이번주 일요일(오늘) 가족 외식을 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물밀듯이 내 머리속을 장악했지만 너무 상냥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일요일에 시간이 되겠냐고 오랜만에 외식 하자고 너도 먹을 거 있는 데로 가자고 묻는 말에 못이겨 흔쾌히 알겠다고 해버린 지난주의 나를 불러다가 파이트 떠서 흠씬 패버리고 싶은 주말이다. 이 시국에 외식하러 가자는 모부도 이해 안가지..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3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상속
장례도 끝났고 삼오제(삼우제)도 끝났다. 49재의 첫 칠일 오전, 나는 일하던 도중 이제 식을 시작한다는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창가로 나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엄마의 영혼이 존재해서 젊고 건강할 때의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을 실컷 다니고 있거나, 혹은 그 생명의 끝을 끝으로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잊었기를. 삼오제까지 끝나면 문상 와 준 분들께 문자나 전화로 감사 인사를 해도 좋..

오늘도 결국 살아냈다 1

매일매일 사라지고 싶은 사람의 기록

차오름

#심리 #우울
하필 이 시기에 고3으로 태어난 나는 , 우울증과 공황발작으로 많이 불안해진 나는, 대견하게도 오늘 하루도 잘 버텨냈다. 우울증과 공황발작이 시작된 건 중3. 하지만 부모는 어떤 말을 해도 정신과는 데려가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20살이 되고 알바를 하면 첫 번째로 갈 장소를 정신과로 정한 이유이다. 부디 그때가 되면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지면서. 부모는 우울증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보장 중에 보장, 내 자리 보장!

이운

#방송 #여성
나는 땡땡이다. 아마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시간을 올인하고 있는 5천만 결정장애 국민들을 위한 해결 상담소로,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여 해결해 준다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방송이다. 그리고 ‘땡땡이’는 이 취지에 맞게, 사연자의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다 만들어진 애칭이다. 비밀보장 73회에서..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