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술계 내 성폭력, 윤리 없는 개인주의의 그림자

핀치 타래페미니즘예술미투

2. 예술계 내 성폭력, 윤리 없는 개인주의의 그림자

피그부

' 코로나 지나면 특강함하께용!?(*월문학회 고문) '

며칠 전 페이스북을 통하여 대구예술계 내 성폭력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한 미술작가 J가 쓴 댓글들을 보았습니다. 저 위의 댓글은 그 중 하나입니다(심지어 게시물의 내용은 청소년에 대한 거여서 청소년 대상으로 성추행 가해자가 특강을 한다고? 하며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네요).  그는 강간 미수에 가까운 성추행을 저질러 유죄 처벌을 받았는데, 피해자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고 최소 1년은 활동을 자제하며 반성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는 그를 비호하는 지역 예술인들의 말에 많이 힘들어했지요. J 외에도 대나무숲을 통해 은퇴한 계명대 미대 교수이자 전국적으로 유명한 초상화가, 설치미술작가, 연구소 대표 등 대구 내 미술 분야 안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원로 미술인들이 가해자로 지목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탈합니다. 

미투 보도 이후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대구시에서도 예술계 내 성폭력 실태 전수조사를 한다거나 공모, 사업 진행 시 제한을 하겠다는 식의 재발방지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일이 있으면 뭉치고 나쁜 일은 개인주의, 예술정신을 들먹이며 기가 막히게 모른 척, 괜찮은 척하는 주변인 덕에 가해자들은 정말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공식적인 조사와 통계가 없으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고 예술행사들은 이전처럼 잘 굴러가니, 여기는 평온하고 무탈한 겁니다.

2016년 하반기 예술계 내 성폭력 고발이 한국예술계에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후 고루한 관습 철폐와 반성폭력 기조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긴 했으나 이처럼 실제 현장은 다릅니다.

개인의 잘못과 예술은 따로 보아달라.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유난 떤다.
넘어간 사람도 잘못이네.
공론화되면 모두의 명예가 훼손되니 조용히 해달라, 글을 내려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겠다.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고 지겹고 또 지겨운 말들... 저 말들을 등에 업고 가해자로 지목된 중견 작가들은 사과문을 SNS에 올렸다가도 슬그머니 지우고 자신의 활동을 홍보하더군요. 그럼 비교적 젊은 예술인들의 의식은 좀 괜찮은 편일까요?

재작년 저는 지역 성평등 포럼에서 출신 예술대학을 포함한 다른 학교 및 분야의 교수들이 저지른 성차별적 언행을 지적하는 발표를 했다가 대학원생들과 교수에게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학교 법무팀과 의논해서 고소하겠다, 대학원 졸업해서 작가로 활동할 사람들에게도 명예훼손이다, 라는 내용. 자본, 계급,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대학교라는, 목적이 명확한 단체-교육 시스템 또한 개인을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지켜야 할 명예'가 등장하는 순간 하나의 이름으로 뭉치는 것이 아주 능숙하더군요. 하물며 한 개념으로 규정되지 않고 느슨한 연대,  개인주의와 개성을 강조하는 예술계 전체는 어떻겠습니까.

예술계 내 행동강령 

 http://safezoneforus.com

(부산문화예술계반성폭력연대, 여성예술인연대, 페미플로어 기획) 

혹자는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오히려 예술계에서 더욱 잘 저항할 수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곳, 누구도 뚫지 못한 오래된 관습의 방패에 구멍을 낼 수 있는 무기를 가진 곳이 바로  예술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딱 그 정도만큼 비윤리적 행위를 예방, 처벌, 감시하는 명확한 시스템이 부족하기에 다수의 합의된  침묵으로 너무나 쉽게 피해자의 말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모든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 연대의 핵심이 늘 그렇듯, 예술계 내에서도 피해자를 지우지 않기 위한 방법은  '촘촘한 감시망'입니다. 윤리가 부재한 개인과 자본화된 기관이 뭉쳐 만들어내는 가해 행위를 가장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그물이죠. 이를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 예술인들은 미투 운동 이후  직접 나서서 성평등 교육, 성폭력 가해자 처벌 등의 내용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반성폭력 워크숍, 전시와 공연, 글쓰기와 영상 제작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성평등 매뉴얼의 경우 2019년 하반기에  부산문화예술계반성폭력연대, 여성예술인연대, 페미플로어가 모여 성평등한 예술현장, 성폭력 예방을 위한 <예술계 내 행동강령>을 기획했고, 대구은 문화도시대구 사업의 일환으로 예술인들이 모여  2019년 12월, 예술계 내 성평등 매뉴얼 워크숍을 가졌습니다. 

기성 예술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심사, 기관, 기획, 제도, 그리고 예술현장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좁은 관계망을 핑계로 유지해 왔던 자신들의 예술관이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과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하네요. 일례로 대구의 대표적인 성매매/성착취 공간이었던 자갈마당이 철거되기 전 운영됐던 2018년 자갈마당 아트스페이스(대구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운영)의 특강에 미술평론가 반이정을 초대하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의 예술계 내 분위기며 자갈마당이라는 공간의 의미와 얼마나 반하는 게으른 기획이었던가요. 부끄럽고 참담한 일입니다.

동시대성과 인간,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정작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그들'의 예술은 이제 빛나지 않습니다. 

SERIES

대구에서 씁니다만

피그부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13. 대화하는 검도..?

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이소리소

#검도 #운동
스스로를 돌이켜보기에, 다수의 취향을 좋아하는 데 소질이 없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예능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체온이 2~3도는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대화에 섞일 적당한 말이 뭐 있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던져보지만 진심이 없어서인지 어정쩡한 말만 튀어나온다. 결국 혼자 속으로 “난 만화가 더 좋아.."라며 돌아서는 식이다. 맛집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어째 운동 취향도 마이너한 듯하고.....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4. Mit Partnerin

여성 파트너와 함께

맥주-

#여성서사 #퀴어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이성애 규범과 그 역할에 익숙해진 내가, 동성애를 하기 위한 일련의 역할들과 그 수행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실용적-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기능에 충실한-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사회에서 ‘여성적’ 이라고 해석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하늘하고, 레이스나 프릴이 달려 있고, 패턴이 화려한 옷들. 재미있는 것은 패턴..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비건 페미 K-장녀 #1 가족의 생일

가족들과 외식은 다이나믹해지곤 한다

깨비짱나

#페미니즘 #비건
다음주 호적메이트의 생일이라고 이번주 일요일(오늘) 가족 외식을 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물밀듯이 내 머리속을 장악했지만 너무 상냥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일요일에 시간이 되겠냐고 오랜만에 외식 하자고 너도 먹을 거 있는 데로 가자고 묻는 말에 못이겨 흔쾌히 알겠다고 해버린 지난주의 나를 불러다가 파이트 떠서 흠씬 패버리고 싶은 주말이다. 이 시국에 외식하러 가자는 모부도 이해 안가지..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