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부자의 유동현금 활용기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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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부자의 유동현금 활용기 (B)

잃어버린 성량을 찾아 보컬학원에 가다.

그릿

댄스 신고식 (*전 편 참고) 을 맛보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 흥미가 없어진 그릿은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랬더니 일상이 너무 단조로워졌다. 그래서 다시 취미생활에 기웃거렸다. 그 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번엔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싶어 했더라? 생각해보니까 죽기 전에 보컬 레슨을 꼭 받아 보고 싶다고 그랬구나. 기억 속 저 편에 있던 버킷리스트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날로 집 근처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에 찾아가 등록을 했다. 주 1회씩 총 4주에 18만원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꽤 즉흥적인 편이다.


 동료들에게 보컬레슨을 받는다고 했더니 곧 데뷔를 하는 거냐 물었고, 내 친구는 내가 프로듀스 101에 나가면 전광판 광고를 해주겠다고 했다. 개인연습생 그릿에게 투표하세요! 대신 돈이 많이 없어서 강남권에는 못 걸어준다고 했다. 그래도 눈물겨운 우정 아닌가.


# 회원 카드 작성

[노래를 왜 배우시는 거에요?] [그냥 취미로요.] [아~] 

[취미로 배우는 분들이 없나요?]

[아뇨. 회사원 분들은 결혼식 축가 앞두고 짧게 배우려고 그러시든요.] 

 '아 진짜요' 영혼 없이 대답했다. 나는 어디에서 노래를 못 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더 잘하고 싶어서 간 거였다. 어느 음에 도달하면 고음을 내기 힘들다, 목소리에 힘이 좀 더 실리길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 녹음실 입장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회원 카드를 작성한 후, 연습실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목을 풀었다. 오늘 노래를 한 번 불러보자고 하시기에 알겠다고 했다. 내가 학원에서 처음 부른 곡은 아이오아이의 ‘소나기’였다. 

 레코딩실에 입장해서 마이크 앞에 서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래를 불렀더니 선생님이 “왜 오셨어요?” 라며 음색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 하 참ㅎ 코평수가 1mm 정도 넓어졌다가 돌아왔다. 

근데 얼굴이랑은 다른 목소리가 난다는 무례한 말을 덧붙였다. 뭐, 어떻게, 복면 쓰고 노래 부를까요?



# 첫 노래

 믹싱된 노래를 메일로 보내고 다음주에 무슨 노래를 할지 정했다. 선생님은 내 음색과 아리아나 그란데의 노래가 어울릴 것 같다며 노래를 골라보라고 했다. 몇 곡을 들었다. 나는 ‘Almost Is Never Enough’ 를 선택했다. 선생님은 다음 레슨까지 1절을 외워오라고 했다. 

 가사와 박자를 익히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루 종일 노래를 들었다. 지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발라드 곡이어서 한 곡 반복이 힘들었다. 삼시세끼 크림 파스타를 먹는 기분이었다.  



# 피드백

/ 1주차 

 발성이 문제였다. 소리가 힘없이 너무 흩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녹음 전에 죽어라 발성 연습을 해야만 했다. 

 / 2주차 

 리듬이 없어서 혼났다. 그냥 부르는 것 같다고 했다. 노래할 때 강약을 조절하는 그루브가 필요했다. 

그리고 내 발음이 너무 정직하다고 했다. 아리아나는 발음을 정확히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I’d like to say we gave it a try 는 알라익투쎄... (‘이’는 들릴듯 말듯)(우와 위의 중간으로 빠르게) 게이비더 투라이~ 처럼 발음에 그루브를 얹어야 했다. 

 / 3주차 

 전보단 나아졌는데 노래를 시작할 때 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 준비... 시...작! 같다고. 이 피드백 때문에 아직도 혼자 노래를 부를 때 눈치가 보인다. 

이 노래는 한 달 내내 연습했다. 나는 아리아나 그런데가 되었다.


# 밤편지의 저주 

 부르고 싶은 노래는 딱히 없어서 또 선생님의 추천을 받았다. 아이유의 밤편지였다. 

 밤편지는 도입부가 꽤 빠르다. 이 밤~ 하고 바로 시작된다. 박자를 맞추기가 매우 어려워서 MR과 기싸움을 할 정도였다. 아리아나 노래 3주차 피드백 때처럼 왜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냐는 물음을 들었다.


히 바암의 흔적
히 바암의 흔적


그리고 또 발음이 너무 정직하다고 했다. 이 밤이 아니라 히 바암 이란다. 맞춤법 파괴자가 된 기분이었다. 

 동료들이 요즘은 뭐 배워요? 라고 물어볼 때마다 밤편지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가끔 나를 마주치면 ‘히밤~’ 하고 노래를 불렀다.


# 저를 아십니까 

 학원에 상주해있는 작곡가가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다른 사람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며 그 사람을 불렀다. 꽤 젊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몇 살?] [스물 다섯이요.] [어 그래 안녕.] 

 너 언제 나 본 적 있어요? 지금의 그릿이라면 “왜 반말을 하고 그러세” 라고 받아쳤겠지만 25세의 그릿은 그러지 못했다. 그냥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야 너 목소리 진짜 좋다.] [그래요?] [연습 열심히 해.]

 순간 입시생이 된 줄 알았다. 아무리 가수를 꿈꾸는 학생들이 많은 학원이라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건 근본이 없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한테 물어봤다. 

[그 분 원래 그렇게 반말을 하세요?] [네. 애가 원래 저래요.] 

 원래 그런 건 없다. 내가 감미로운 보이스를 소유한 토르 피지컬의 건장한 남성이었다면 반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닐 거다. 

 나는 그가 얼마나 알려진 작곡가인지 모른다. 앞으로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육신에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에게 권력과 명성이 주어지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 위플래쉬

 느닷없이 벤의 ‘꿈처럼’ 에 꽂혔다. 호기롭게 불렀다가 목소리를 잃는 줄 알았다. 그렇게 높은 곡인 줄 모르고 도전했던 것이다. 

 고음이 너무 안되는 탓에 녹음을 하다 말고 레슨실에서 발성 연습을 자주 했다. 배에 힘을 많이 줘야 단단한 소리가 나오는 법인데, 선생님은 나에게 뱃심이 없다고 했다. 

 힘이 들어오는 느낌을 찾기 위해 의자에 앉아 상체를 숙인채로 노래를 불러보기도 했다. 여전히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자기가 주먹으로 배를 밀어 볼테니 주먹이 밀리지 않게 힘을 주고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나는 영화 위플래쉬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제자가 미친듯이 드럼을 치는 씬이었다. 

선생님은 버텨보라고 배를 밀고, 나는 죽어라 꿈처!!!! 럼!!!! 하고 소리를 냈다. 아 이것이 위플래쉬구나. 했다.



# 스트레스 

 선생님도 내 실력에 욕심을 내셨다. 나는 그만큼 잘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잘 하려는 욕심과 취미 생활이 또 충돌했다. 짜증이 나는 것은 그만 둘 때를 알려주는 신호이리라. 아마 이건 시작부터 잘못된 것 같다. ‘잘 하고 싶어서’ 온 게 화근이었다.


# 그만 두겠습니다

 내 생각엔 발성이나 호흡에 중심을 둔 수업이라기 보단 한 노래를 마스터하는 수업에 가까웠다. 

그래서 다른 노래를 부를 때 어떤 식으로 발성과 호흡을 접목시켜야 하는 지 1도 몰랐다. 매번 알라익투쎄와 히밤만 부를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한 여름밤의 꿈처럼 실용음악학원과 이별했다.



# 새로운 선생님을 찾아서 

 나는 레슨을 한 번 더 받았다. 그 땐 학원은 아니고 개인 레슨이었다. 학원보다 5만원 정도가 더 비쌌다. 

 대신 그 선생님은 발성과 호흡을 엄청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어서, 두 달 내내 발성과 호흡을 연습했다. 크림 파스타를 두 달 내내 먹는 기분이었다. 


# 오옥 

 새 선생님은 고음을 내는 부분에서 성대가 조이면 목에 많은 무리가 간다고 했다. 하품을 할 때처럼 목구멍을 여는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 좋단다.  하지만 목구멍을 너무 여니 헛구역질이 났다. 뭐든지 중간을 찾는 게 어렵다.

 헛구역질을 해가며 연습을 거듭한 결과, 세 달째가 되어서야 노래와 접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패턴 때문에 흥미를 잃어서 그만 두었다. 


 결론적으로 노래 실력이 확 향상되지는 않았다. 나는 잃어버린 성량을 찾지 못했고, 고음을 국수 가락처럼 뽑아내지도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소리를 내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요즘엔 그냥 내 맘대로 부른다.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불렀다면 벌써 데뷔했겠지! 맥주를 마시며 다른 취미로 뭘 해볼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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