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자와 후회

핀치 타래

운명론자와 후회

운명론자는 후회하지 않는다

시코

과거의 나는 후회가 참 많았다. 인생을 리셋하거나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마 그건 내가 내 삶을 너무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삶을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는 그런 나르시시즘적인 생각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대신에, 삶을 좀 덜 사랑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운명론자라고 묻는다면, 나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말들이 필요하겠지만, 그 질문에 충실하게 답변하자면 그렇다. 나는 운명론자에 속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취한다고 한다. 그것이 온전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점, 그곳에서의 내가 행했던 것은 적어도 그 시점의 나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 행동을 후회할 수 있는 것도, 그때의 나보다 좀 더 정서적으로 여유로워졌거나, 어떤 의미로든 성장했거나, 시간을 들여 넓게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후회한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한들(아무런 기억을 가지지 않고 돌아간다면) 계속 그 행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소한 후회까지는 하지 않기 어렵지만(예를들면 시킨 음식이 맛이 없어서 다른 걸 시킨걸 후회하거나, 시험 때 답을 고쳐서 틀린 경우 같이) 마음속에 깊게 남아있는 후회는 더 이상 없다. 어렸을 때 나는 누군가가 좌우명을 물어보면 ‘후회할 일을 하지 말자’라고 대답했다. 그땐 후회를 아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좌우명을 정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제 더 이상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누군가가 좌우명을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시코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오늘도 결국 살아냈다 1

매일매일 사라지고 싶은 사람의 기록

차오름

#심리 #우울
하필 이 시기에 고3으로 태어난 나는 , 우울증과 공황발작으로 많이 불안해진 나는, 대견하게도 오늘 하루도 잘 버텨냈다. 우울증과 공황발작이 시작된 건 중3. 하지만 부모는 어떤 말을 해도 정신과는 데려가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20살이 되고 알바를 하면 첫 번째로 갈 장소를 정신과로 정한 이유이다. 부디 그때가 되면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지면서. 부모는 우울증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말 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4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상속인 조회 서비스 조회 완료 후 한 달 정도는 은행과 보험 정리에만 매달렸다. 사실 지점이 많이 없는 곳은 5개월 여 뒤에 정리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자동차 등을 정리했고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상속인 조회 서비스에 나온 내역들을 한꺼번에 출력해 철 해 두고 정리될 때마다 표시해두고 어떻게 처리했는지(현금수령인지 계좌이체인지 등)를 간략하게 메모해두면 나중에 정리하기 편하다. 주민..

세 사람

세 사람

이운

#치매 #여성서사
1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고 지갑은 어느 가방에 둔 건지 매번 모든 가방을 뒤져봐야 합니다. 친구들은 우리 나이 대라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며 걱정 말라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까지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는 수영을 다녀오는데 그날따라 비도 오고 몸도 따라주질 않아서 바지가 젖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길가에 털썩 주저앉..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제목없음] 일곱 번째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제목없음

#여성서사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참으로 어렵다. 나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되물어봤다. 그리고 의심했다. '저 사람은 만나도 괜찮은걸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에는 설레기도 하고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은걸까? 순간의 감정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에는 좋으니까로 결론이 난다. 좋은걸 어떡하나? 만나야..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