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탈코르셋을 한 순서를 요약하자면, 다음 4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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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어 브래지어, 색조화장(립 제외), 매니큐어, 하이힐, 렌즈, 긴 머리 등 많이 불편한 코르셋
- 단발머리 (->숏컷->투블럭)
- 치마, 반바지, 브라렛, 비침 있는 옷, 피부화장, 립 컬러, 액세서리(귀걸이, 반지, 팔찌, 목걸이), 다이어트, 향수 등 비교적 일상적인 코르셋
- 제모 (...특히 겨드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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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을 잃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탈코르셋 운동 초반에 탈브라와 탈메이크업을 했다. 원래 편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화장을 잘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워낙 건성에다가 예민한 피부라 화장을 하면 곧잘 따가웠고, 건조해서 하얗게 각질이 뜨는 걸 해결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매번 미리 화장을 안해서 약속장소 가는 버스에서 열심히 두들겼으니, 그 화장실력이 오죽했으랴.. 매니큐어와 페디큐어도 바를 땐 재밌지만, 바르기만 하면 손발이 차가워지고 불편했기에 자주 못했다. 그리고 키가 작으니 나중에 힐을 신어야 한다는 말에 중학생 때부터 굽있는 구두로 발을 훈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은 몇년을 신어도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급한 성격에 자꾸 발을 삐끗하여 애꿎은 발목 인대만 몇번 파열됐다. 이렇듯 1번 코르셋들은 모두 나에게 고통을 주던 코르셋들이기 때문에 '코르셋' 개념을 알자마자 바로 벗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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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몇달 후 투블럭을 했고 3번 코르셋을 벗을 수 있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스러운 헤어스타일'을 잃고 나자, (대부분의 탈코러가 그렇듯) 탈코르셋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전에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코르셋만 벗었다면, 투블럭 후에는 '사회적 여성성을 강화하는 모든 코르셋'을 구별해내고 버려낼 수 있었다. 나의 행동을 제약하는 모든 옷차림과 매일매일 시간을 뺏어가던 피부화장, 액세서리, 향수 등을 그제서야 일상에서 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다이어트도 잃게 되었다. 내 행동을 제약하는 옷을 버리니까,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편하게 옷을 입고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슬슬 작은 체구에 갇혀있지 않고, 운동을 통해 벌크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도 싹트기 시작했다. 다이어트가 아닌 건강을 위한 운동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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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부분의 코르셋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잃기 어려웠던 건 바로 '제모'였다.
팔, 다리, 얼굴 등은 몇년 간 '제모 안히고 버티기 - 못참고 제모해버림 - 다시 버티기'를 반복한 끝에, 이제는 털이 있어도 맘이 많이 불편하지 않다. 아직도 신경이 쓰이는 건 바로 겨드랑이 털...! 복싱장에서나 헬스장에서 반팔을 입고 팔을 들어올리는 운동(덤벨 레터럴레이즈, 숄더프레스 등)을 할 때마다 '앗 겨털 보이면 어떡하지' 하면서 최대한 사람이 양쪽에 없는 곳으로 가서 운동을 하려는 나를 발견한다. 내 겨털을 창피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이 내 겨털을 보는 게 견딜 수가 없다. 고백하건데, 겨털은 아마 내가 가장 마지막에 벗을 코르셋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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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지금은 몇번의 실패(다시 제모...) 끝에 이제는 겨드랑이털을 밀지 않고 버티고 있지만, 대신 민소매 옷을 못입는다. 내 겨털은 아빠와 남호메와 똑같이 아주 까맣고 양도 많고 길게 나는데 이걸 그대로 다른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오소소 돋고 털이 쭈삣 설 정도로 싫다. 사실 탈코 전에 제모를 할 때에도 (충분히 얇지 않은) 팔뚝이 내보이는 게 싫어서 민소매를 자주 입지 않았고 그나마 아주 더울 때 가끔 민소매원피스 입는 게 다였는데, 이젠 원피스도 안입으니 옷장에 민소매 옷을 찾기 힘들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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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윗 문단의 내용은 다 핑계다. 내가 집에서는 겨털을 안민 채로 민소매를 입고 다닐 수 있지만 밖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건, 내가 코르셋을 다 못벗었기 때문이다! 새삼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국에서 해변가나 수영장에 여자들이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은 채로 벌러덩 누워있어도 괜찮은 그런 세상이 올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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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겨드랑이털도 코르셋인가(난 보기싫어서 미는 거지 여자라서 미는 거 아닌데 등) 싶은 사람을 위해 덧붙이자면.. 난 20대 초반에 겨털 레이저 제모에 쓴 돈만 60만원은 족히 넘는 것 같은데, 당시 친구들과 더 싸고 덜 아픈 겨털 레이저 제모하는 것을 서로 소개해주곤 했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선 겨털을 없애기 위해 몇십만원 내고 아픈 레이저제모를 받는 이가 없으니, 이는 여성에만 부여된 과제이며 코르셋이다. 게다가 이전에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에서 겨드랑이 털을 그린 게 신성모독이라고 비판받았단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자연 상태의 여성의 신체에는 겨드랑이 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체모를 없는 것 취급하는 문화 자체가 남상중심적 사고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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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겨드랑이털 탈코하는 귤팁 아는 사람 좀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