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아모 쿠바 시즌 투 2. 오비스뽀 친구들과 나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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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아모 쿠바 시즌 투 2. 오비스뽀 친구들과 나오미

나오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쿠바의 일상 생활자가 되다

2012년, 나는 암 제거 수술을 했다. 당시 나는 쿠바라는 나라와 깊은 사랑에 빠졌었고, 늘 그리움에 시달렸다. 내가 원한 건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마음을 온통 뺏긴 그 곳에서 흔한 쿠바나처럼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매일 같은 시각 눈을 뜨고, 같은 곳을 거닐며, 이웃들과 가벼이 아침인사를 나눌 수 있는 일상이 간절했다. 모든 치료과정이 끝나면 곧장 쿠바로 달려가겠다는 희망 하나로 반년을 넘게 버텼다. 그렇게 나는 내 몸에 찾아온 암이라는 불청객을 잘 이겨냈고, 2013년 2월 쿠바로 돌아갔다.

여행자거리 두 블록 옆에 위치한 아담한 까사에 2개월치 선불을 지급했다. 드디어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쿠바에서 매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나는 '쿠바 여행자'에서 한 단계 진화한 '쿠바 일상 생활자'가 되었다.

나의 일상은 이랬다. 아침 9시에 까사에서 조식을 먹고, 발코니로 나가 아침을 여는 쿠바노들을 구경했다. 오전 11시경에는 여행자거리인 오비스뽀 거리로 나가, 아르마스 광장까지 혹은 기분이 좋은 날엔 말레꼰까지 산책을 했다. 산책이 끝나면 오비스뽀 중간쯤에 있는 로컬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뒤엔 근처 시장에서 채소, 과일, 고기 등의 식재료를 구매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반드시 오비스뽀 거리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공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음악을 듣기도 했고, 그저 멍하니 사람 구경을 하기도 했다. 

오비스뽀 거리
식재료를 샀던 집 근처 시장

한 시간 정도 광합성을 끝내면, 살사 레슨을 받으러 갔다. 흥겨운 리듬과 춤사위에 온 몸을 맡긴 채, 땀으로 흠뻑 젖은 레슨 두 시간이 끝나면 상쾌한 기분과 동시에 피곤이 몰려온다. 까사로 돌아가 시원한 냉수 샤워를 하고 달콤한 낮잠을 즐겼다.

잠에서 깬 뒤엔 함께 지냈던 하우스메이트들(나의 쿠바생활에 무한 활력을 제공했던 친구들이다. 그들 또한 조만간 제대로 소개할 예정이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해먹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다같이 말레꼰에 가거나, 쿠바나처럼 양껏 멋을 부리고 클럽에 가기도 했다.

매일매일 꽉 찬 하루를 보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항상 내일이 기대되는 나날이었다. 2013년은 정말이지 나의 쿠바인생 최대의 황금기였다.

나의 친구를 소개합니다

이 시절 나는 2개월 내리 아바나 구시가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늘 같은 일상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몇몇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처음엔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보내는 시간도 늘어났다. 오늘은 내가 오비스뽀 거리에서 사귀었던 수많은 나의 친구들 중 몇 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F와 나오미

첫번째 친구는 F다. 그는 나의 남자친구 O와 나를 이어준 큐피트의 화살이다. 그는 쿠바노지만 라스타 신자다. 라스타는 라스타파리안(Rastafarian)의 줄임말로, '라스 타파리'라는 구 에티오피아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자메이카 흑인들의 종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신자로 밥 말리가 있다.

이들의 교리에서는 신체 부위 모든 것을 소중히 한다. 그래서 라스타는 절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도 라스타는 특유의 드레드락 헤어스타일과 화려한 차림새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40세 이후부터는 엄청나게 길어진 머리를 모자 속에 돌돌 감아 넣고 다닌다. 그래서 연장자일수록 모자가 점점 높아진다. F 역시 늘 드레드락 헤어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다.

F는 독일에 부인과 아들이 있었다. 2010년, 쿠바 여행자였던 부인은 F와 사랑에 빠졌고 독일로 돌아간 후 임신 사실을 알았다. 함께 독일에 정착하고 싶었으나, 당시만 해도 쿠바 국민은 해외로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또한 수많은 서류작업이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거기다 F는 고위 경찰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마리화나 때문이다. 라스타는 제의식 때 마리화나를 이용하는데, 쿠바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마리화나가 불법이다.

그의 부인은 결국 독일에서 F없이 출산 후 아이를 양육했고, 그는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도 영상으로만 아들과 만날 수 있었다. 독일에서 부인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크게 부족함은 없이 지냈던 것 같다. 그의 직업은 마사지 테라피스트였다. 마사지 매니아인 나의 친구 한 명이 그에게 마사지를 받았었는데, 보통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F와 함께 다니면 늘 흥미로운 경험이 뒤따랐다. 한 번은 본인이 요즘 받는 강의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봤는데 티베탄 레이키(reiki : 손을 통해 에너지를 전달하는 대체의학) 교습소였다. 쿠바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조차 매우 신기했다. 수많은 이들이 가부좌를 틀고앉아 '옴~'을 외치고 있는 모습에 정말 내 두 눈을 의심했다. 

F가 데려간 레이키 교습소

또 한 번은 함께 말레꼰을 산책하다 그의 친구를 만났다. 쉴새없이 랩을 하는 친구였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이 빠른 랩을 하며, 무릎 관절 하나에 의지해 몸을 뒤로 꺾는 무지막지한 개인기를 펼쳤다. F의 주변에는 늘 친구가 많아, 그 덕분에 나도 많은 사람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F와 랩하는 꾸러기들

2014년에 쿠바를 다시 찾았을 땐 F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을 통해 그가 드디어 독일의 가족들과 상봉했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얼마 전에는 둘째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까지 전해들었다. 나의 친구 F가 부디 독일에서 행복한 매일을 맞이하길 바란다.

살치파파로 친해진 인연

두번째 친구 L 역시 라스타이다. 그는 오비스뽀 거리의 공원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낸다. 모자의 높이가 얼굴 사이즈의 두 배 이상 올라가는 것으로 봐서, 그는 꽤나 연배가 높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주로 관광객과 사진을 찍고 받는 팁으로 생활을 유지하는데(구글링을 하면 그의 사진이 여러 장 뜰 정도로 유명인이다) 허락없이 도촬을 하는 경우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와 친해진 계기는 이렇다. 어느날 그가 공원에 앉아 멍을 때리는 내게 다가와 농담인듯 진지하게 말을 던졌다.

"치나. 나한테 살치파파(소세지와 감자튀김) 도시락 한 개만 선물해 주면 안 돼?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말없이 조용히 일어났고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손에 살치파파 도시락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세뇨르! 살치파파 사왔어요. 같이 먹어요."
살치파파

아무리 외국인에게 시도때도 없이 온갖 수작(구걸, 헌팅, 캣콜링 등)을 거는 오비스뽀 거리라지만, 팔순 노인이 내게 이 한 마디를 건네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처음엔 나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던 L은 가지런히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살치파파 도시락을 하나씩 나눠 갖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뒤로 나는 간혹 살치파파를 사들고 가 그에게 건넸다. 살치파파는 고작 10쿱이었으나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내가 배우는 스페인어 어휘는 무한대였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말했다.

"나오미. 넌 나와 사진 찍고 싶지 않니? 너에겐 돈 안 받아. 무조건 무료야." 
나오미와 L(맨 오른쪽)

구시가지를 자주 찾지 않는 요즘이지만, 공원 앞을 지날 때면 나는 늘 L을 찾는다. 젊은 시절 큰 심장수술을 받았다던 나의 어르신 친구 L. 부디 건강하게 계속 살치파파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름 모를 나의 친구

세번째 친구는 이름을 모른다. 그는 언어장애인이다. 마당발 F를 통해 알게 된 친구다. 마주칠 때마다 항상 밀짚모자를 쓰고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이름 모를 친구

그의 주변인들 중 수화를 사용하는 이는 본적도 없거니와 본인조차도 전혀 수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나와는 그저 바디랭귀지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기가 막히게 대화가 잘 통했다.

그에게는 외국인 여자친구가 한 명 있었고, 임신도 했었는데, 어느 날 말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도 부인의 부모님이 장애인인 본인을 인정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아이를 단 한번만 보는 게 그의 소원이지만, 정작 그는 아이의 성별도,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입은 매일 웃고 있으나 눈이 항상 슬퍼보였던 것은. 

이름 모를 친구의 모자를 뺏어 쓴 나오미

오비스뽀 거리에서 그를 보지 못한 지 몇 년이 흘렀다. 언젠가는 내 이름 모를 친구의 다친 마음에 새 살이 솔솔 돋아나면 좋겠다.

T여사와 작은 불상

마지막으로 소개할 친구는 T여사이다. 그는 나의 보석 같이 찬란한 O군이 경찰로 근무하던 시절, 늘 무료로 밥을 챙겨주었던 분이다. T여사는 O군이 나와의 관계를 오픈한 손꼽히는 인맥 중 하나였다.

그의 집은 평범하고 허름한 보통의 가정집이었다. 그 곳에서 이웃들에게 음식 한 접시를 제공하고 1쿡씩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집 밖에선 늘 시장바구니를 들고 분주히 움직였고, 집 안에선 부엌에서 종일 요리를 하고 있었다. 

요리하는 T

나는 아무 이유없이 종종 그의 집에 들러 그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용건도 없고 딱히 할 말도 없는데 찾아오는 불청객을 T여사는 늘 반갑게 맞이해 주고 거실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늘 내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O는 많이 먹어. 키가 크니까 많이 먹지."

가끔 요리를 하기 싫을 땐 T여사집에 들러 밥을 사먹기도 했다. 외국인으로서 달걀 구하기가 힘들었기에 늘 달걀요리를 부탁했다. 그 시절만 해도 고기가 비싸지, 달걀은 비싸지 않았기에 T여사는 늘 접시 밖으로 튀어 나갈 정도로 큰 달걀부침을 내게 해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작별인사를 위해 그의 집에 들렀더니 T여사가 내게 말했다.

"뚱뚱하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불상을 본 적이 있어. 행운을 가져다 준다던데. 다음에 올 때 그거 하나 구해줄 수 있을까? 텔레비전에 올릴 수 있게 아주 작은 사이즈로 말야."

다음 해, 쿠바로 향하는 나의 짐속엔 미니어처 불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오미가 사다 준 불상

단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

올 해 오비스뽀 거리를 방문하니 참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아이스크림 매장도, 늘 앉아서 시간을 보내던 공원도 그대로이건만,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나오미! 내친구 꼬레아나!"하고 외쳐 줄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늘 그 자리에서 인사하고 반겨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았다. 암보스문도스 호텔 앞에서 평생을 연주하며 지냈을 것 같은 로스맘비세스(los mambises) 할아버지들도 해가 갈수록 멤버가 줄어들었다. 

로스맘비세스 할아버지들

하지만 나는 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단 한가지의 진리는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사실이다. 지금의 오비스뽀 거리는 나의 전성기를 주름잡던 그 곳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전성기 속 무대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오비스뽀 거리보다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더 많이 접하고 있는 나의 수많은 '거리 친구들'. 언젠가는 오비스뽀에서 재회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 때까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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