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아모 쿠바 1. 말레꼰

알다여행

떼아모 쿠바 1. 말레꼰

나오미

쿠바에서 제일 부지런한 장소가 있다면

나의 신체 부위 중 가장 '열일'하는 곳을 한 곳만 꼽으라면, 1초의 고민도 없이 '입'이라 말할 것이다. 나는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고, 말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인들과 식사 약속이라도 잡히는 날이면, 나의 입은 먹어야 할 지 말해야 할 지 늘 갈팡질팡한다.

그러면 우리의 쿠바는 어떠한가. 쿠바에서 가장 '열일'하는 곳을 꼽자면, 단연코 말레꼰(El Malecón)이라고 본다. 파도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만든 일종의 방파제, 그것이 말레꼰의 공식적인 역할이다. 흔히 수도인 아바나의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해안가에 위치한 대부분의 도시에는 말레꼰이 설치되어 있다. 

한낮의 말레꼰

말레꼰은 수년 전 TV광고를 통해 한국에 한 차례 소개 된 적이 있다. 집채만한 파도가 방파제를 훌쩍 뛰어 넘어 드넓은 4차선도로를 시원하게 적시고, 그 곳을 유유히 걸어가는 조각미남의 모습. 어떤 브랜드 광고인지는 잊었어도 그 장면만큼은 많은 이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최근에도 또 한 번 말레꼰이 한국인들에게 꽤 유명해지는 계기가 있었다. 송혜교와 박보검이 나오는 한 드라마가 쿠바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말레꼰은 두 연인의 사랑을 이어주는 장소로 등장했다. 드라마 첫 회가 끝난 후 말레꼰은 포털 실시간 검색어 4위를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지금부터는 말레꼰이 쿠바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단지 범람하는 파도를 막아줄 뿐이라면, 말레꼰은 내 첫 번째 수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법의 낭만가루를 뿌려 드립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말레꼰은 정말 바쁘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는 이들에게 낚시터의 역할도 해 줘야 하고, 다이빙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다이빙대도 되어 주어야 한다(다이빙하다 얻는 부상에 대한 책임까지 지지는 않는다). 음악인들이 파도소리와 더불어 신명나는 연주를 할 수 있도록 공짜 무대가 되어준다. 그 뿐인가. 해질녘이면 ‘칼퇴’하는 햇님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밤이 되면 더위에 지친 쿠바인들이 땀을 식힐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다. 추측컨대 먼 과거 헤밍웨이에게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노인과 바다>의 영감도 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말레꼰의 비공식적 주 업무는 ‘사랑의 큐피트’다. 말레꼰 특제 낭만가루를 바닷바람에 실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불을 붙인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더 달콤한 사이가 되게 해 주고, 사랑을 찾는 누군가에겐 커플이 될 수 있도록 용기를 심어준다. 정작 자신은 바다가 끊임없이 파도에 실어 마음을 보내와도 수십 년간 철벽을 치고 있으면서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말레꼰은 원치 않아도 수많은 이들의 TMI(too much information)에 눈과 귀가 노출되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내가 말레꼰에서 겪은 컬쳐 쇼크 썰을 한 가지 풀어볼까 한다. 본의 아니게 말레꼰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준 케이스다.

* 주의 : 아래의 내용에는 노골적인 이성애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면과 말레꼰의 상관관계

말레꼰에 산책 갈래?

쿠바의 거리를 거닐고 있는 당신에게 누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대답을 하기 전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한다. 이 일은 2013년 쿠바에 3번째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여행 중에도 별다른 계획 없이 어슬렁대는 일상을 즐겼던 나는, 그날도 아무 계획 없이 여행자 거리인 오비스뽀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 때 작은 공원 입구에서 머리를 땋고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풍성한 곱슬머리가 야무지게 땋여 내려가는 모습에 매료되어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본인을 ‘봉봉’이라 소개한 그는 헬스 트레이너이고, 근처에 살고 있어서 산책하는 나를 자주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말레꼰에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산책을 해도 괜찮을까? 약간 고민했지만, 결국 그와의 산책을 허락했다. 아직 날이 훤했다. 나의 짧은 스페인어를 연습하기에 안성맞춤인 기회라 생각했다. 

그의 헤어스타일이 완성되고, 우리는 말레꼰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우리의 뒤에서 거센 야유와 휘파람이 들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시선보다는 함께 걷는 그의 역대급 패션에 귓불이 화끈거려 시선 처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외모에 자신감이 넘친 탓일까. 그는 심하게 달라붙는 민소매 셔츠에 핑크색 고무줄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부담스런 차림새에 슬금슬금 떨어져서 걷고 있던 중, 그가 차도가 위험하다며 내 손을 낚아챘다. 그는 자연스레 내 손에 깍지를 끼었고, 이상한 촉을 감지한 나는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 찔끔찔끔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레꼰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이글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내게 키스를 하려했다. 기겁을 한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단칼에 거절했다. 

내 입술 정말 부드러워, 한번 느껴 봐.
집 앞에서 널 본 순간부터 너에게 반했어.
나는 키스 전문가야.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눈앞에 아른대는 핑크색 핫팬츠는 나를 매우 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지속된 거절에 화가 난 그는 벌떡 일어나며 내게 언성을 높였다.

나하고 키스할 생각도 아니었으면서 왜 말레꼰에 왔어!?

‘네가 산책하자고 했지 키스하자고 했느냐’고 따질 겨를도 없었다. 나는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극도로 성난 상태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그의 핑크색 가랑이를... 기겁한 나는 그를 말레꼰에 버리고 우사인 볼트와 견줄 만한 속도로 그 곳을 벗어났다. 

그렇다. 말레꼰에 산책하러 가자는 말은 쿠바판 “라면 먹고 갈래?”였던 것이다. 어쩐지 민박집 아들이 항상 산책 간다면서 향수로 목욕을 하고 나가더라니.

석양과 나, 단 둘이서도 충분히 로맨틱한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쿠바에서의 내공이 어느 정도 쌓인 후엔, 나 역시 말레꼰에서의 '산책'을 즐겼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말레꼰에 산책 가지 않을래?"라고 물었을 때 그 쾌감이란... 말레꼰이 뿌려준 낭만가루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공포의 핑크색 핫팬츠와 함께 했던 '컬쳐쇼크' 사례를 제외하면, 나는 말레꼰을 함께 산책한 모든 남자와 연인으로 발전했었다. 

말레꼰에서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바라보는 불타는 석양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았다. 나의 무릎을 베고 누운 연인과 한 입씩 나누어 먹는 아이스크림은 집에서 먹는 맛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간혹 수위 높은 스킨십을 나누다 파도의 엄중한 경고를 받는 연인들도 종종 목격되곤 했다. 그것이 나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이따금씩 길에서 그 시절에 들었던 로맨틱한 음악이 들려올 때면, 나는 이내 말레꼰의 불타는 사랑꾼으로 돌아가게 된다. 

참 이상하다. 그 어떤 고급스런 데이트도 말레꼰에서 싸구려 과자를 나누어 먹던 시간을 따라갈 수가 없다. 말레꼰이 바닷바람에 실어 뿌려주는 낭만가루가 없어서인가보다. 

한국인에게 쿠바의 인지도가 오른 후로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날씨에 관련된 질문이다. "말레꼰 파도 사진 찍으려면 어느 계절이 좋아요?" 라는 질문도 단골 질문 중 하나다. 집채만한 파도가 도시로 범람하는 절경을 보고 싶다면 꼭 겨울 시즌에 쿠바를 방문하시라. '열일'하는 말레꼰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기대 이상의 절경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겨울의 말레꼰은 성질이 괴팍하다. 멍 때리다 언제든 물폭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할 것! 

그리고 적어도 두 번 이상은 말레꼰의 석양을 감상해줬으면 좋겠다. 늘 같은 자리에 앉더라도 매일매일 다른 모습의 석양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석양이 지는 동안, 당신의 몸을 휘감은 낭만가루가 남은 쿠바일정을 더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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