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아모 쿠바 0. 프롤로그

알다여행

떼아모 쿠바 0. 프롤로그

나오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일찍이 의료계에 종사하다, 과중한 업무에 몸과 마음이 시들시들 병들던 어느 날. 나는 앞뒤로 25kg의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휴직계를 던지고 9개월 간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본명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외국인 친구들을 위해 ‘나의 기쁨’ 이라는 뜻의 닉네임인 ‘나오미’를 사용하기로 했다. 친 글로벌 여행자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인도를 시작으로 마음 가는 대로 길 위의 삶을 살아가던 중, 나의 마음이 정착한 곳이 있다. 

바로 쿠바였다.

그래서, 쿠바는 언제 가요?

사실 쿠바는 세계여행을 하며 가고 싶었던 수많은 나라들 중 탈락한 국가였다. 결정적인 원인은 누군가가 쿠바에 대해 신랄하게 쓴 장편의 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글은 줄곧 쿠바에 대해 비판을 넘어서 비난을 했다. 떠나면서도 '출국'이 아닌 '탈출'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다.

초짜 여행자에게 베테랑 선배 여행자의 여행 후기는 별 볼일 없는 가이드북보다 훨씬 강한 신뢰를 주기 마련이다. 그의 후기를 본 순간, 19세 때부터 영화<더티 댄싱 하바나 나이트>를 보며 꿈꿔왔던 쿠바에 대한 나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 인생에서 쿠바는 그렇게 멀어지는 듯 했다.

반전은 길 위에서 일어났다. 세계여행 시작 후 들렀던 두 번째 국가인 네팔의 한 식당에서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그는 400여 일 동안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기 직전이었고, 상대적으로 남은 여행 기간이 많은 나를 부러워했다. 여행 일정의 대부분이 중남미에 할애된 내 계획을 들은 그가 내게 가장 처음으로 한 질문은 이거다.

그래서 쿠바는 언제 가요?

쿠바에 갈 계획이 없다고 하자, 눈이 동그래지며 펄쩍 뛰던 그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은 세계여행 기간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쿠바에서 맞이하던 매일이었다는 것이다. 그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눈망울에 설득되어 그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쿠바왕복 티켓 발권까지 마쳐버렸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 쿠바라는 선물을 선사한 그 사람, 아마 보험설계사를 한다면 지금쯤 ‘이 달의 보험왕’이 되어있으리라.

신고식

하지만 쿠바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쿠바는 ‘카더라’만 대충 주워 듣고 들어가면 안 되는 국가였던 것이다. 당시 나는 모든 국가를 아무 정보 없이 발 닿는 대로 다니던 중이었다. 쿠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여행에 필요한 기초 지식 단 하나도 없이 쿠바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 입성부터 신고식을 호되게 치렀다. 뭐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특별할 것 있겠나, 하고 쉽게 생각했다가 높지도 않은 코가 싹둑 베여버린 것이다.

입국하여 1박2일 동안 쿠바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사기꾼을 다 만났다. 보름이라는 기간을 쿠바에서 보내야 하는데 수중에는 2만원뿐이었다. 나의 신용카드로는 쿠바 그 어디에서도 돈을 뽑을 수 없었다. 결국 난감함과 스트레스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동행인과 티격태격 다투게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맺힐 즈음, 기적처럼 한국인 여행자들의 후기에 단골로 언급되던 숙소를 발견했다. 그 곳에 들어간 지 5분도 안 됐는데, 이틀 간 겪었던 온갖 설움과 쿠바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땀범벅이 되어 거지꼴로 초인종을 누른 우리를 보고 바로 찬물을 한 잔씩 갖다 주며 환하게 웃어주었던 집주인 아주머니는 현재 현금이 없다는데도 일단 체크인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아주머니의 아들이 준 정보로 은행 창구에서 현금 서비스를 받아 남은 쿠바 일정의 시름을 덜고 나니, 그제야 서서히 쿠바의 매력에 취해갈 수 있었다.

쿠바의 하루, 쿠바의 일상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내가 기억하는 쿠바의 아침은 늘 비누향기가 났다. 국가에서 배급했던(지금은 공급이 끊겼다) 빨래비누로 손빨래를 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깨끗한 옷을 입고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혼잡 속에서 흘러나온 비누향기가 공기와 섞여 나의 콧날을 간질였다.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에서 진한 쿠바식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며 분주하게 하루를 여는 쿠바인들을 구경했다. 반갑게 인사 나누는 이웃들, 손님을 태우고 부지런히 달리는 비씨택시(Bici-taxi, 자전거택시) 기사님, 박물관에 있어야 할 비주얼인데도 열심히 달리고 있는 올드 카.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빵장수 아저씨에게 빵을 사서 길어올리는 '빵 바구니'.

찹쌀떡 아저씨를 연상시키는 깊은 성량의 빵장수 아저씨는 항상 정시에 같은 장소를 돌았다. 동네에 “빵사세요. 빵!” 하는 투박한 빵송(song)이 울려 퍼지면 고층 건물의 여기저기에서 아저씨를 부른다. 그리고 우물물을 길어 올리듯이 끈에 매달린 바구니를 발코니 아래로 내리면 아저씨가 그 안에 빵을 넣어준다. 계란을 듬뿍 넣고 만든 노란 모닝빵 한 조각이 단돈 50원!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숙소 아주머니께서 금방 만든 따끈한 빵을 바구니로 올려 상을 차려주면 아침식사를 시작한다. 유기농으로 자란 쿠바의 과일은 못생겼지만 당도가 높다. 흰색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은 노른자가 풍부하고 고소해 빵과 궁합이 환상이었다. 

쿠바의 아침식사.

아침을 먹고 나면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이 골목 저 골목을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100년은 족히 넘은 콜로니얼 양식 건물과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는 언제나 훌륭한 피사체가 되어 주었다. 조각 같은 피지컬의 쿠바노(Cubano, 쿠바 남자), 도미노 게임을 즐기는 동네 청년들, 대문 앞에 걸터앉아 시가를 피우는 노인, 자전거에 보조좌석을 달아 아이의 등교를 돕는 아버지. 쿠바인의 일상 속을 걷고 있는 시간이 그저 마냥 좋았다. 

까르륵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라이브로 연주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 그 소리를 따라 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말레꼰의 부서지는 파도소리, 줄 끊어진 허름한 기타로 훌륭한 노래를 뽑아내는 거리의 악사들까지... 쿠바는 잠깐의 산책만으로 시각적, 청각적 허기를 모두 달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쿠바에서는 늘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해질녘엔 늘 말레꼰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럼까지 한 잔 곁들이면 금상첨화!

나와 쿠바의 러브스토리

이토록 아름다운 쿠바의 풍경은 여행 초반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쿠바를 드나들며,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다른 이들도 한 번쯤은 겪었다는 것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던 선배 여행자도 쿠바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화가 났을 거라 추측해본다. 여행을 추억하며 일기처럼 써내려갔던 블로그의 쿠바 여행기에는 반복되는 질문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알고 나면 별 게 아닌 매우 기초적인 정보였다. 하지만 그 기초적인 정보조차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없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겪어야 할 고초는 가혹했다. 그로 인해 쿠바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까봐 속이 상하기도 했다.

쿠바라는 국가가 점점 세계적인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바 여행에 관한 가이드북은 풍부하지 않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통감한 나는 한국인 여행자의 입맛에 딱 맞는 쿠바 가이드북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사표까지 던지고 집필에만 집중한 끝에, 2016년 수많은 이들의 재능기부와 응원을 기반으로, 유일무이한 한국인을 위한 쿠바 여행 가이드북 <올라! 쿠바>를 출판했다. 이걸 내려고 1인 출판사까지 창업했다. 누군가가 정해 준 틀이 아닌 내 방식으로 쿠바에 대해 자세히, 그리고 자유로이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부터 깨알 같은 팁까지 알려주고 싶었던 게 많았다.

쿠바는 내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준 나라다. 그래서 앞으로도 쭉 내 인생은 쿠바와 함께할 것이다. 언젠가 쿠바에서 매일을 맞이하리라는 희망으로, 현재는‘1년에 3개월은 쿠바에서 산다.’는 단기 목표를 세우고 매년 상반기 쿠바를 방문하고 있다. 쿠바를 알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의 취향에 맞게 여행 컨설팅 및 인솔도 겸하고 있다. 그렇게 나와 쿠바의 러브스토리는 계속 진행 중이다.

<떼아모 쿠바>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쿠바를 방문했던 나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기록이다. 세세한 여행 정보는 <올라! 쿠바> 가이드북에 400페이지 분량으로 기재해 두었기에, 이 글은 일기처럼 조잘조잘 그리고 투덜투덜 써내려갈 작정이다. 때로는 두 팔을 벌려 나의 치부까지 안아주는 듯 하려다가도, 때로는 두 눈이 빠질까 겁이 날 정도로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밀당의 고수, 이 쿠바라는 성가신 나라와 깊은 사랑에 빠져버린 나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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