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Feminist) Scientists 시즌 2 2. 여자의 자리를 빼앗는 사람들 - 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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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 (Feminist) Scientists 시즌 2 2. 여자의 자리를 빼앗는 사람들 - 산파

하미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첫 직장은 과학 기사를 생산하는 언론사였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회사 내 여성 비율이 높다는 점이 한몫했다. 대표도 여자였고, 팀장도 여자였다.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내 얘기를 들은 한 회사 선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게 과연 좋은 징조일까……

과연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입사 후 몇 개월이 지난 뒤 알게 됐다. 이 회사 역시 남자 직원을 선호하고 키워주려 한다는 것, 같이 입사한 남자 동기는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나보다 연봉이 높다는 것.

또한, 이 회사의 여성 비율이 높은 것은 여성이 다니기 좋은 회사여서가 아니라 이 업계가 노동에 대한 보상이 적은 곳이어서 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글쓰기란, 특히나 잡지사에서 글을 쓰는 일이란, 노동 강도에 비해 대단히 저평가된 노동이다. 나는 남자들은 그런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직장을 옮긴다고 생각한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2018년 남성대비 여성 임금의 비율은 66.6%이다. 남성이 100만 원을 벌 때 여성은 66만6000원을 번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남녀 임금 격차가 크다.

같은 직종에서 같은 노동을 해도 여성은 적게 받는다. 다른 한편 여성이 많은 직종은 저평가된다. 여자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직종을 떠올려보라. 그 분야는 남성 비율이 높은 동종업계의 다른 직종에 비해 저임금일 가능성이 높다(의사와 간호사, 초중고등학교 선생님과 대학교수 등). 반대로 연봉이 높은 직업에 여성이 진입하기 시작하면 해당 분야의 평균 임금이 떨어지는 현상도 있다.

여성이 많은 분야가 저임금인 이유는 그 직업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로 여자이기 때문일 수 있다. 특정 직종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 해당 분야의 여성을 밀어내고 남성이 진출하여 자리를 차지한 과정은 역사적으로 꽤 자주 반복됐으니까.

그중 하나의 예로 출산에 관한 전문성의 영역에서 여성들이 밀려난 역사를 소개한다.

2000년 동안 여성의 영역이었던
산파술

산파는 2000년 동안 여성 건강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출산이라는 분야의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하고 전문성을 독점해왔다. ‘midwif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산파는 역사적으로 여성이었고 가족 구성원이나 이웃 주민이 출산할 때 도움을 주었으며 출산에 관련한 여러 가지 폭넓은 지식을 가졌다.

산파는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나이를 먹은 뒤에도, 과부가 된 이후에도 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돈벌이 중 하나였다. 17세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산파는 출산 분야를 독점했고 왕실에서 후계자가 태어날 때도 노련한 산파가 이를 도왔다. 당시 다른 의료계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산파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전문적인 교육 기관은 없었지만, 직업상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독학으로 배우거나 도제 생활을 통해 익혔다.

산파술은 이렇듯 여성의 전문 영역이었으나 16세기 무렵 ‘남성 산파man-midwife’가 등장한 이후 두 세기에 걸쳐 산파와 남성 의사가 누가 출산이라는 분야를 차지할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여성 산파는 산업혁명 이후 점점 쇠락하다가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전문가 집단이 출현한 이후에는 더욱 극적으로 몰락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산파술의 역사에서 여성 산파가 쇠락하게 된 과정과 그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러스트 이민 


여성 산파에서
남성 산과의사로

1550년 이전에는 남성 의료인과 산파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17세기와 18세기가 되면서 수공업으로 여겨졌던 전통적인 분야가 전문화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의료분야에 종사하던 남성들은 길드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전문성을 획득해갔다.

예컨대 1731년에는 프랑스 왕립 외과 아카데미가, 1800년에는 런던 외과대학이 설립되면서 외과의사의 지위는 대학 교육을 받은 내과의사와 비슷해질 수 있었다. 약사, 치과의사, 수의사 등도 18세기를 지나며 전문직으로 거듭났다(그니까 이들이 지닌 전문성이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쟁취해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산파는 다른 길을 걷는다. 왜? 첫째로 여성 산파는 자율적으로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산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체적으로 조직을 구성할 권리를 갖지 못했고, 대학에 들어갈 수도 대학을 세울 수도 없었으며 도리어 남성 관료에 통제를 받아야 했다.

둘째로 이 분야에 남성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출산과정에 남성이 참여하는 것은 모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계급의 출산을 도와주는 남성이 처음 등장한 이후 16세기 후반부터 산파술을 시행하는 남성이 생겨났다. 이후 귀족이 아닌 중산층도 이 선례를 따르면서 1760년대가 되자 상인과 장인 계층까지 남성 산파를 선택하기 시작했다(Donnison, 1977: 22).

남성 산파가 많아지자 남성 산파와 여성 산파의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남성이 출산 분야에 진출하자 그제야 산파 역시 전문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여성 산파는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하며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산파술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기술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성 산파는 자신들이 ‘겸자’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산모의 고통을 줄여주고, 출산과정에 더 정교하게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여성 산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겸자는 가위 모양으로 생겼으나 날이 없는 외과 수술 도구로, 분만할 때 겸자를 산모의 질 안에 넣어 아기 머리를 잡아 꺼내는 데 쓰였다. 겸자가 개발되자 분만은 빨라졌지만, 산모나 아이가 죽는 일도 있었다.

산과의사가 사용했던 겸자. 이탈리아 피렌체 박물관. 사진 하미나

겸자는 여성을 산파술에서 내모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외과의사만 외과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고,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여성 산파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여성은 외과도구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처럼 여성 산파는 조직을 구성할 권리도, 교육을 받을 기회도 박탈당한 채로 자신들의 전문성을 잃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성 산파가 여성 산파보다 유능하다는 생각이 퍼졌고, 이러한 주장 아래에서 상류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여성 역시 산파보다 남성 산부인과를 선택하게 된다(Donnison, 1977: 10-23).

1820년대에 남성 산파가 산파술 분야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대학 교육을 받은 남성 산파를 산과의사로 부르게 되었다. 18세기 내내 여성 산파는 출산은 자연이 정한 여성 고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려 애를 썼지만, 노력의 결실을 보지 못했다.

여성 산파는 새로운 학문을 알려 달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18세기 말이 되면서 산파는 출산에 관해 자신이 누려온 독점적인 지위를 잃고, 한때 자신들이 지배한 분야에서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

일러스트 이민 

출산 영역에서
여성이 밀려나면서

여성 산파의 쇠락은 단지 여성의 일자리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1760년대에 활동한 영국의 산파 엘리자베스 니헬(Elizabeth Nihel)은 여성 산파의 시대가 지나가고 남성 산과의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여성이 산부인과 영역에서 스스로 몸을 통제할 권리를 잃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피임법과 같은 산아제한 지식 역시 여성 산파가 몰락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전해지기 어려워졌다. 니헬은 남성이 산파술 분야에 진출한 이유는 그것이 좋은 돈벌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성 산과의사가 상류층이나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출산 영역은 얼른 빼앗았지만 가난한 사람의 출산을 돕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Nihell, 1760(Schiebinger, 1991에서 재인용)).

20세기가 되어서는 여러 계층의 더 많은 여성이 산파보다는 산부인과 의사를 통한 병원 출산을 택하게 됐다. 한국의 경우에는 1980년대 말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면서 병원 분만이 대중화되었다(정연보, 2004: 24-34).

오늘날 대부분 여성은 병원 출산을 택하지만, 오랜 세월 여자들은 가까운 사람이나 산파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아기를 낳았다. 최근 출판된 책 우아영의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 송해나의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에서 잘 드러나듯, 현대 출산 담론의 초점이 여성보다는 태어날 아기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여성의 주체적인 판단이나 결정권 그리고 산모의 건강이 자주 무시되는 현상이 한때 이 분야를 지배했던 여성 전문가가 자신의 자리를 잃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좀 생각해봤다. 여성이 돈을 적게 받는다면 그건 여성이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믿어져 왔기 때문이라고.어떤 분야의 권위와 전문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필요하다고. 어느 정도의 배타성을 가진 집단 내에서 서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해야만 간신히 유지하거나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혼자서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전문성이 설득의 영역이라면 우리는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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