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젠더 [2] 공간전략으로 탈조선 다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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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젠더 [2] 공간전략으로 탈조선 다시읽기

‘탈조선을 젠더 빼고 이야기한다고? 미친 거 아냐?’

진실



‘탈조선을 젠더 빼고 이야기한다고? 미친 거 아냐?’  

나의 여자 선배 한 명은 대화 도중 내가 기존 연구에서 탈조선을 원하는 여성 청년에 대한 젠더 관점에서의 분석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자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12월 15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청년 관점의 젠더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 대응방안 연구’에 따르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라는 질문에 20대 여성의 79.1%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간 여성 문제에 대해 경찰과 사법부 등 국가 기관이 보여 온 반응에 대한 분노가 담긴 통계다. 그러니까 만약 20대 여성들이 탈조선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그 원인과 과정, 결과는 자신이 인식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것은 분명히 이들에게 가해지는 젠더 및 섹슈얼리티 억압의 영향 아래 놓일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탈조선 담론은 청년들의 탈조선 욕구가 사회경제적 불안으로부터 야기되었다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20대 여성 및 퀴어 청년들이 직면한 사회 불안정성 그 자체, 그리고 그 속에서의 대응 과정 모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젠더 및 섹슈얼리티 억압을 간과해 왔다. 또, 탈조선 담론은 기성세대에 충격을 던져주는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담고 있는 더욱 깊은 함의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예컨대 청년들이 ‘탈조선’을 원한다는 기사에 대해 으레 기성세대가 보이는 반응 중 대부분은 ‘저 통계는 도대체 어디서 뽑아낸거냐’, 또는 ‘아니던데?’, 즉 내 주위에는 실제로 떠난 청년들이 없으니 이런 논의는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는 일갈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기존의 ‘탈조선’ 담론이 한국에서의 완전 이주라는 일면 극단적 사례인 탈조선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조선 담론을 이처럼 탈조선, 즉 ‘한국에서는 죽기보다 살기 싫어 떠난 이들’의 ‘이민 또는 외국 시민권 획득을 통한 한국으로부터의 탈출’에만 초점을 맞추어 구성하는 것은 탈조선 담론이 갖고 있는 수많은 함의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남아있기를 선택하거나 그럴 수 밖에 없어 남아있는 청년들의 고통, 그리고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이들이 취하는 다양한 전략들이 논의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처럼 삶의 도처에 존재하는 권력에 대해 여성 청년들이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에서의 대항품행을, 탈조선이 갖고 있는 기존의 좁은 정의에 갇히지 않고 그려낼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에 대한 작은 답으로, 나는 탈조선을 공간전략의 하나로서 다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공간전략이란 불안한 위치에 있는 이들-불안계급-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사회에 대응하고 조금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취하는, 새로운 공간을 형성하거나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등의 전략을 뜻한다. 아를 통해서 우리는 탈조선을 불안계급으로서의 청년들이 수립한 공간전략 스펙트럼 위의 한 예시로 재개념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결과적으로 매우 달라 보이는 탈조선을 감행하는 불안정성 대응 방식과 한국에 남아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은 그 모두가 공간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또한 불안계급의 항해는 탈출의 계획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꾸리기 위한 전략의 수립이라는 이주 연구의 통찰은, 오늘날 탈조선이 한국으로부터의 탈출과 더불어 스펙 쌓기나 취직의 필요성과 함께 맞물려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더욱 잘 포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탈조선을 공간전략으로 다시 읽어보는 작업은 우리에게 여성 및 퀴어 청년들은 사회경제적 불안과 더불어 자신들이 노출된 젠더 및 섹슈얼리티 억압 또한 불안정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탈조선을 고민하기도 한다는 점 뿐만 아니라, 한국에 남아있는 여성 및 퀴어 청년들 또한 자신이 처하는 젠더 억압 등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공간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예컨대 내가 인터뷰한 이들은 한국에 남되, 여전히 무뎌지지 않는 문제의식과 울분을 자신과 비슷한 생각과 공감대를 가진 이들과 나누는 장소인 ‘대피소’를 만듬으로써 한국에서 살아남고자 했다. 한편 인터뷰 대상 중 여성 및 퀴어로서 페미니즘 리부트 전에도 한국사회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일부 친구들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가족이 없거나 바뀌지 않는 세상에 염증을 느끼는 상황에서 탈조선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들에게서는 이동 및 이주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불안함을 호소하고, 한국과 해외 여러 공간에 자신이 들를 수 있는 ‘기지’와 같은 장소를 만드는 양상이 나타났다. 한편 이들 중에서는 이처럼 전세계에 ‘기지’를 구축해두고 반복적으로 그 사이를 이동하는 삶만으로 개인의 친밀감과 외로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호소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삶의 궤적들은 기존의 ‘헬조선 탈출’에만 집중하는 관점으로는 그려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20대 여성 및 퀴어 청년들의 공간전략들은 신자유주의 통치 전략으로부터, 그리고 젠더 및 섹슈얼리티 억압으로부터 야기된 불안정성에 근본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공간전략 연구에 대한 대표적 비판은 공간전략의 수립이 개인이 근본적인 문제는 회피하는 가운데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생존 전술에 몰두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회의적 지적이다. 한국을 헬조선으로 명명하고 탈출을 꿈꾼다는 것은 한국의 적체된 문제들을 한 자루에 쓸어담아 버리고 나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비판이 생겨나는 건 그 때문이다. 또 탈조선 등의 반복적 이주는 하나의 전략이기는 하나 여전히 개인의 품과 금전적 비용이 많이 드는 방법이고, 그러한 노고는 개인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문제점이 있다. 예컨대 특히 탈조선을 택한 친구들은 그 비용을 대부분 자신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감당하는 등, 장기적으로 불안정성에 대비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해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했다. 

   이 한 회의 글을 통해서 모든 의문에 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과 동료들이 국내외 도처에 자신들만의 ‘대피소’ 또는 ‘기지’를 구축하는 과정을 애정을 갖고 기록해야 한다. 그런 노력들을 통해서 도처에 존재하는 권력에 대해 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20대 여성, 그리고 퀴어 청년들은 한국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의 목소리와 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법적으로는 같은 시민이라 할 수 있을 여성 그리고 퀴어 청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배제로 인해 이들은 심지어 자국을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20대 여성 및 퀴어 청년들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 친분에 의존한 것이나마 국내외에 자신들만의 장소를 마련하면서 자신을 억누르는 권력 관계에 대항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형성된 작은 장소들이 이미 저항을 실천하고 있으며, 더 적극적인 정치 단위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대피소 또는 기지의 구성은 페미니즘 리부트로 인해 20대 여성 및 퀴어 청년들 사이에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편화된 결과이자, 그러한 보편화 경향을 다시 강화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대 여성 및 퀴어 청년들이 탈조선을 외친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 사회의 적재된 문제에 깔려 굴복한 것이라거나 그러한 문제로부터 도피해버리는 태도로 치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그 속에서 각자의 자리와 더욱 넓은 장소에서 그러한 문제에 대항하는 의지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공간전략의 관점에서 제대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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