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세월의 아욱국 “김치도 있으니까 모자라면 더 말하고, 후추도 뿌려 먹어. 그래야지 맛있어” 더운 날씨로 땀범벅이 됐다. 국밥 한 그릇을 비운 노인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노인이 나가자 가게는 텅 비었다. 2000원에 국밥을 파는 4평 남짓, 20년 세월 국밥집. 가게 외관에서 그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황태해장국, 아욱국, 우거지국. 선택지가 단촐했다. 아욱국밥 두 그릇을 시켰다. 전체적으로 국밥집 내부는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주인의 손길이 많이 닿은 듯 정갈했다. 후추와 소금도 깔끔하게 놓여있었다. 냉면 그릇에 아욱국이 가득 담겨 나왔다. 공기에 담겨있는 밥은 윤기가 흘렀다. 만원 한...
사라진 공간 그늘이 사라졌다. 의자도 사라졌다. 공원 가운데 자리한 동상 뒤로 생긴 그림자에 노인들이 앉아 대화를 나눈다. 움직이는 그림자를 따라 노인들도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간간이 있는 의자에도 사람은 없다. 노인들은 풀숲 옆에 자리를 틀고 앉는다. 더러 신문지를 깔고 있기도 한다. 사람 키 높이만한 나무 몇 그루가 심어진 공원 귀퉁이쯤 가면 노인 여남은 명이 모여 있다. 나무가 심어진 화단 둘레가 의자인양 엉덩이를 들이밀고 걸터앉아 바둑을 둔다. 바둑판을 차지 못한 이들은 저마다 훈수로 열을 낸다. 땡볕더위에 노인들은 햇빛을 막을 2단 접이 우산을 하나씩 들고 공원 외곽에서 신문을 읽거나 무심히 앉아...
한 잔에 천원, 서서 마시는 선술집 노인들은 대개 지갑이 없다. 그들이 입은 양복 주머니에서, 등산조끼 윗주머니에서, 가방 안 쌈지에서, 바지춤에 이어진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가 나온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이 가득 채운 술잔으로 바뀐다. 이 곳에선 모든 술이 한 잔에 천원이다. 소주를 주문하면 맥주 상호가 적힌 유리잔에 한 잔이 나온다. 막걸리를 주문하면 막걸리 사발에 한 사발 가득 나온다. 가게 주인은 창이 트인 가게 계산대에 서서 주문과 동시에 술을 따라준다. 잔돈을 거슬러 줄 일이 별로 없고, 잔에 술을 채우는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어 그 모습이 경쾌하다. 노인들은 술을 받아들고 가게...
섬과 육지 종로는 섬으로 불렸다. 서울 시내 특정 연령층이 모이는 동네가 종로 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종로만이 섬으로 불린다. 노인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섬이라는 인식에는 다름이 전제되어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다름이 틀림으로 규정되는 순간 우리는 섬을 해체하고 육지의 규칙 안으로 편입시키게 될 것이다. ‘파고다공원 성역화 사업’ 이 그랬다. 파고다 공원의 명칭을 탑골공원으로 바꾸고, 공원 내 의자를 없애고 기존에 자유롭게 개방했던 공원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투어 형식으로만 돌아볼 수 있게 바꾸었다. 섬을 해체시킨 것이다. 자연스럽게 공원에 상주하던 노인의 숫자가 줄었다. 이용객의 반발과 가이드 유지의 어려움으...
어버이연합이 떠난 자리 종묘공원에서 어버이연합이 사라졌다. 2016년 4월 22일, 어버이연합의 추선희 사무총장(57, 남)이 청와대와 ‘관제데모’를 논의했다는 일명 ‘어버이연합 게이트’의혹이 터진 후부터다. 어버이연합이 사라진 후,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을 대표하던 정치 발언들도 사라졌을까.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은 본래 시국 강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에 일조한 노인들의 공로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면 노인들은 그 앞에 빼곡히 앉아서 환호했다. 그러나 공원이 재정비된 이후에는 그 풍경도 달라졌다. 옛날 같으면 하루 2000~3000명이 오가던 공원이었으나 지금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몇 백 명 정도 오갈까 말까다. 그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