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심청가>
심청가가 이렇게 어려운 줄 처음 알았다.
심봉사의 아내 곽씨 부인은 현철하시며 백집사가감百執事可堪 무슨 일을 하든지 능히 감당할 수 있다하신 분이라서 서른에 아주 눈 먼 남편 심학규를 버리지 아니하고 조석으로 돌보았다
심청이 이야기를 마당놀이로는 볼 때는 어려운 줄 몰랐는데, 창극으로 보자니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은 하겠으나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감도 안 잡일 지경이다. 국립창극단의 <심청가>는 초지일관 어려운 한자어와 고어를 나열했다.
문제는 이 심청이라는 열다섯 먹은 낭자의 출신 성분과 그에게 주어진 고난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다. 심청가에 따르면, 심청은 원래 서왕모 딸인데 귀가시간을 조금 어긴 죄로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아 지상으로 쫓겨나 봉사가 된 심학규와 현철하신 곽씨부인의 딸로 태어난다. 하지만 현철하신 곽씨 부인은 청이 태어난지 7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청이는 눈 먼 애비와 홀로 남는다. 귀가시간에 쪼금 늦은 벌 치고는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셈이다. 심청이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인생이라는 난관을 돌파하는지 보자.
줄거리
심청은 눈먼 심학규(심봉사)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눈먼 아비를 봉양하는데, 나이 열 한 살이 되자 아버지에게는 집에 있으라 하고 자신이 나서서 구걸로 아비를 먹여 살리기에 나선다. 심청이 효행으로 소문이 자자하게 나자 어머니의 친구인 장승상 부인이 불러 수양딸로 삼겠다 하지만 아버지 걱정에 거절한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눈 먼 아비는 늦어지는 딸을 마중나갔다 동네 개천에 빠져 지나가선 시주승 덕에 목숨을 부지한다. 시주승 말이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하면 개안할 수 있다 하니 신나서 일단 약조를 덜컥 해버린다. 하지만 돌아서 생각해보니 삼백석을 마련할 길이 없는 심봉사는 시름에 잠긴다.
아버지가 시름에 잠긴 연유를 묻자 심봉사는 두 번 감출 생각도 없이 냉큼 청이에게 시주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청은 인당수 산제수를 구하는 뱃사람들에게 자신을 삼백석에 판 후 아버지에게는 눈 뜨시라고 절을 한 후 인당수에 빠진다. 옥황상제는 그 모습을 귀히 여겨 용왕을 보내 심청을 살리고 심청은 용궁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 선녀가 된 어머니 곽씨 부인과 조우한다.
용왕은 연꽃에 청을 태워 다시 뭍으로 보내니 청을 던져 폭풍을 면했던 뱃사람들이 돌아오는 길에 연꽃을 발견하여 왕에게 바친다. 신하들은 입을 모아 왕비감이라고 칭송하기에 청은 왕비가 된다.
한 편 눈 먼 심봉사는 딸을 그리 보낸 후 뱃사람들이 모아준 돈으로 살아가다 돈 냄새를 맡은 뺑덕 어멈과 살림을 차린다. 청이 죽은 후 삼년이 되어가건만 눈 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라에서 봉사를 모아 잔치를 연다 하니 두 사람 같이 행장을 차려 나서는데, 가진 돈을 헤아려 보니 뺑덕 어멈이 뱃사람들이 모아준 돈을 이미 홀라당 다 해치운 참. 서울로 가는 길에 뺑덕어멈은 젊은 봉사와 바람이 나서 내빼 버리고 심봉사는 잔치 끝나는 날에나 겨우겨우 도착한다.
도화동 심학규 도착이란 말에 버선발로 나온 청은 아버지 앞에서 눈을 뜨시라고 읍소하고 하늘이 감읍하여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뜨자 그 자리에 온 봉사들, 안 온 봉사들 모두 따라 눈을 뜨고 온 세상에 경사가 가득하다.
의외로 벡델 테스트 통과
이 작품은 명백하게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거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성에 이름까지 온전히 풀네임으로 불리는 여성은 주인공 심청이 한 명 뿐이지만, 장승상댁 부인과 곽씨 부인이 있다. 조선시대 이야기인 만큼 이름조차 없지만, 장승상댁 부인과 청이 대화의 주인공은 청이 자신이다.
장승상댁 부인은 죽은 친구 곽씨의 딸 청이의 미모와 영민함에 반해 수양딸로 삼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청이의 계획에 부잣집 딸이 되는 것은 들어있지 않기에, 맘씨 좋은 장승상댁 부인의 등장분량은 거기서 끝이다.
청이의 어머니 곽씨 부인은 죽은 뒤 저승에서 선녀가 되어 하늘 일을 돌보다가, 딸이 용궁에 왔다는 소식에 옥황상제의 인심으로 단 한 번 딸과 조우한다. 와서도 반갑다는 말보다는 하늘나라 벼슬 자랑이 더 인상적이다. 이승에 두고 온 딸과 만났는데도 벼슬자리가 바빠 급히 돌아가신다. 어차피 딸은 인간이라 금방 세상 하직하면 천계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해로할 터이니 급할 게 없다는 것인지, 신참 직장여성의 조급한 심정인지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곽부인은 직분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모녀간의 대화 내용 중에 물론 설정상 심학규의 아내라 남편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모녀간의 정이나 일 얘기가 더 비중이 크다. 어미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청이가 엄마 품에 달려드는 장면은 판소리 '심청가'에서 곽부인이 청이 두고 떠나는 장면과 더불어 관객들이 두번째로 눈물을 찍어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쨌든 깔끔하지는 못하지만 이러저러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심청의 다음 여정을 보자.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심청 이야기에는 불교 세계관과 도교 세계관이 혼재되어 있다. 기적은 부처님과 옥황상제가 각각 절반씩 떠맡는데 이것도 참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 심청에게 일어나는 기적은 옥황상제가, 부처에게 빌은 심봉사의 기적은 부처가 들어주는 식이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참으로 사이좋게 공존하는 두 가지의 종교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 사이에서 심청의 운명은 무엇일까? 인당수에 빠져 죽는 것? 아버지의 눈을 뜨이는 것? 임금의 아내가 되는 것? 아니다. 심청의 목표는 ‘나 하늘로 돌아갈래’다.
그렇다. 심청은 애당초 선녀였다.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서왕모의 딸이었던 심청은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예닐곱부터 아버지를 대신하여 구걸행각에 나섰을 때 심청의 심정은 참담했을 터다. 하지만 이 때 구걸에 나선 심청의 모습을 한 번 보자. 심청 나이 아직 열 살 전, 요즘 아이들과 결코 같을 수 없는 환경과 상황에 처한 터이지만 심청이 구걸의 신으로 등극하는 비법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심청이 거동 보아라. 밥 빌러 나갈 적에, 헌베 중의(中衣) 다님 매고, 말만 남은 헌 치마에, 짓 없는 헌 저고리, 목만남은 질보선에, 청목휘항(靑木輝項) 눌러 쓰고, 바가지 옆에 끼고, 바람맞은 병신처럼, 옆걸음 처나갈적에”
한마디로 일부러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배고파 쓰러질 듯한 시늉을 하며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거기에 낳은 지 초칠일만에 세상 떠난 어미와 눈 못 보는 아비를 눈물 나게 묘사하여 더운 밥에 산해진미를 구걸로 획득하는 재주를 터득했다. 이는 오십이 넘었어도 몰락한 양반 출신 심학규는 전혀 얻지 못한 기술이다. 심청이는 아침에 구걸 나가 점심에 돌아올 즈음에는 바가지에 맛난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가지고 귀가할 수 있었다.
이렇듯 영악한 청이 공양미 삼백석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날 사람이 누구겠는가? 바로 자신을 수양딸로 스카웃하려고 했던 장승상댁 부인일 것이다. 하지만 청이는 그 쪽으로는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이 선택지를 머리에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청이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인당수에 산 재물로 팔려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장승상댁 부인이 수양딸로 삼는 조건으로 삼백석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실제로는 장승상댁 부인에게는 입도 떼지 않는다. 왜일까? 청이의 효심이 너무 깊어 그렇다는 전통적 해석을 뒤로 제껴두면, 일단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청이가 삶을 그만두고 싶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생 전체를 구걸과 남의 집 허드렛일로 보낸 청이지만 앞날도 그닥 밝지는 않다. 앞 못 보는 아버지를 두고 시집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효도 한 번 통 크게 하게 인생 하직하는 게 청이에게는 이승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두번째는 다르다. 애당초 선녀였던 청이는 옥황상제의 화를 풀 방법이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아들인 이삭을 신에게 바치겠다고 칼을 빼 든 것처럼, 청이도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그럴 판에 장승상댁 부인이 행여라도 삼백석을 내주었다가는 큰일인 것이다.
청이 자기 목숨을 팔아 삼백석을 얻는 시점에서 이미 심봉사는 딸 목숨 팔아 눈 뜨고자 하는 무지랭이 나쁜 애비로 전락한다. 청에게 주어진 감옥인 심봉사에게 죄를 떠넘기고 자신은 그 감옥을 탈출하는 아주 상큼한 전략인 것이다. 죽으면 선계로 돌아갈 것이고, 산다면 용서를 뜻한다. 청이에게는 계획이 다 서 있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청이의 목표는 선녀였던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벌로 주어진 인간 세상이 좋을리가 있겠는가만,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청이도 그러저러 참으며 한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안의 가장이었던 어머니 곽씨 부인은 얼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버리고 남은 것은 그야말로 청에게 주어진 감옥이었다. 눈 먼 아비와 그 아비를 봉양해 먹여살려야 한다는 운명.
선인으로 천도나 따먹으며 우아한 삶을 살던 그에게 이 비루한 인생은 청천벽력이지만 나름 견디어 낸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뺑덕이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았다가는 이제는 지옥불 속으로 떠밀려 가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말 나온 김에 뺑덕은 대체 뭘 잘못했더란 말인가. 앞 못 보는 심봉사 수발 들어주며 심봉사가 받은 삼백냥의 은전 좀 나눠 썼기로서니. 삼 년이면 충분히 나름 아껴쓴 셈이다. 게다가 심봉사라는 인간은 입만 열면 죽은 지 오래인 현철하신 곽씨부인 타령이니 오던 정도 다 도망갈 지경이다.
현철하신 곽씨부인이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남편 보살피는 것도 사실 조혼하여 쌓인 정이 있었으니 가능했을 일이다. 게다가 그 현철하신 곽씨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된 이유가 또 가관이다. 아기를 낳자마자 집안일 할 사람이 없어 집안일 하려고 찬 물에 손 담갔다가 그리된 것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심학규가 봉사라 집안일을 아예 못할 줄 알았더니, 곽씨 부인이 끙끙 앓자 단숨에 마을 의원에게 찾아가 약을 지어와 약을 다리고 짜서 부인 앞에 대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엌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이 낳은 곽씨 부인을 돌보기는 커녕 집안일 하게 두었다가 아내를 잃었다. 심학규, 그의 잘못이 크다.
청이가 고작 여섯 일곱살에 아비 대신 구걸을 나가겠다고 하자 딱 한 번 만류하더니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라고, 오늘 아침만 하라는 비루하고 궁상맞은 대사를 친다. 그래놓고 청이 인당수에 몸 던지는 그날까지 밥 얻어먹은 인물이 바로 심학규다. 그러고 보면 심청이 심학규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한 이유를 대략 알만도 하다. 어쩌면 심학규라는 인물은 심청과 곽씨부인 둘 모두에게 주어진 ‘죄값’이자 감옥일지도 모르겠다.
심학규는 사실 봉사가 아니었어도 양반인 자신이 직접 나가 일을 할 생각 없이 아내를 부리고, 딸을 부려 살고도 남았을 인물이다. 그러므로 청의 1차 목표는 아버지의 학대 아닌 학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심학규가 자신의 딸 청을 지극히 사랑하였기에 학대라는 말은 과장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행동은 학대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탕약 달이고 짜는 난이도 꽤 높은 집안일까지도 할 수 있었던 그가 ‘안’ 했기 때문이다. 어제 아이를 낳았어도 여자이자 아내인 곽부인이 집안일을 해야 했고, 그가 세상 떠난 이후에는 어린 딸이자 여자인 청이가 밥을 빌어 올려야 했다. 청이가 그저 인간의 아이도 아닌 바에야, 이 지독한 감옥은 벗어나고 볼 일이 아닌가.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No, but...
사실 이 모든 해석은 그야말로 주관적 해석일 뿐이다. 청의 캐릭터는 초장부터 붕괴일로다. 우선 빼어난 영민함으로 불쌍함을 극대화하는 퍼포먼스로 눈 먼 아비와 자신이 굶어죽지 않을 방편을 마련할 줄 알았던 그가, 정작 삼백석이 필요해지자 부자인 장승상댁에게 부탁한다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도덕적 강박증이 있다거나 요령이 없다고 생각하기는 좀 무리가 따른다.
게다가 앉으나 서나 아버지 생각인 청이가 정작 왕비가 된 후 아버지가 있는 도화동으로 파발마를 보내어 모셔오기만 하면 될 일을 전국 맹인 잔치를 연다는 요상한 수를 쓴다. 효행을 하는 거 같으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심청가의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매 장면마다 다른 청이가 쏘옥 튀어나온다.
본심을 ‘효심’이라고 본다면 청이라는 인물은 설명이 어려운 늪으로 빠져든다. 물론 옛날 이야기라 몰락한 양반의 여식이 한 큐에 왕비가 되고, 상인 계급인 뱃사람이 벼슬에 오른다는 등, 서민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 줄 계급 전복의 포인트들이 전진 배치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 이야기 안에서 청은 효심과 이기심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한다.
청이를 ‘효녀’라고 본다면 그의 캐릭터는 열 두 번이고 붕괴되지만, '선녀'라고 본다면 다르다. 청이는 주도면밀하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용서받고, 상까지 획득하기 위한 장치를 면밀하게 계획하는 인물이 된다. 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시각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but ...
청에게 연애란 뒷일이다. 임금은 청이를 만나기 전에 중전이 세상을 떠난 홀아비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재밌다. 다들 임금에게는 처첩이 주렁주렁 달린 걸 알면서도 굳이 청이 중전이 되어야만 속이 풀리는 것이다. 심청전의 독자는 명확하다. 그들은 계급사회를 뚫고 올라가는 이야기를 즐긴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왕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왕은 될 수 없으므로 왕비를 만든다.
임금과 청의 로맨스는 중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특히 임금에게는 선택의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청을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해 중전을 삼는 것뿐이다. 이후에도 왕은 중전 옆 병풍으로만 남는다. 그러니 사실상 이 작품에서 청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결정을 하느냐는 중요하지만, 그 기준은 연애가 아니다.
효도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대부분의 결정은 고전적인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 달려 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위해 추운 겨울에 홀로 동냥에 나섰고, 아버지를 위해 삯바느질과 남의 집 일손을 거들었으며, 아버지를 생각해서 장승상댁 수양딸 되기를 거절했고, 아버지 눈을 뜨라고 자신을 인간 제수로 팔았으며, 아버지를 찾고자 전국 맹인 잔치를 열었다.
하지만 청이의 목적을 지상에서 벌을 받는 선녀의 이승 형벌 탈출기로 보았을 때, 장승상의 수양딸이 되기를 거절한 것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와 다시 만나는 극적인 장치를 통해 만천하에 자신의 효심을 내걸 수 있는 맹인 잔치는 단연 계획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맹인 잔치를 통해 심학규 만이 아니라 모든 맹인이 일시에 다 눈을 떴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감복한 결과이다. 이름을 알 길 없는 이 선녀는 매우 영민하고 인내심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형벌이던 이승 생활마저 상으로 뒤집어엎는데 성공한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No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으로서 청이도, 선녀로서 청이도 그 자신만의 발전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전생이 없는 인간 청의 시점에서 본다면, 청은 전생의 업보로 주어진 삶을 사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 와중에 단 한 번 스스로의 목숨을 던지려고 시도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혹독함 때문인지, 효심 때문인지, 둘 다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도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그의 의지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심청가'를 선녀의 이승 탈출기로 보자면 선녀의 목표는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고 그 수단은 극단적인 자기희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청이는 어린 시절부터 영리하게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마침내 십오년을 눈 먼 심봉사를 착실하게 봉양한 후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일생일대의 도박에 모든 것을 건다. 그리고 왕비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 하늘의 용서와 상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때까지 자신의 희생을 계속 어필하며 진정성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의 계획이라면 그의 진정한 발전은 인간으로서의 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이 끝난 후에 하늘로 돌아가고 나서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영원한 신선의 삶에서 짧디 짧은 인간으로서의 생은 아무리 왕비라 해도 여전히 탈출해야만 할 지점일 것이다.
청이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국립창극단의 심청가는 가끔 등장인물들의 나이가 혼동되곤 하는데, 이를테면 심학규가 청을 얻은 게 나이 마흔이고 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든 게 열다섯, 그 이후 삼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하는데, 그 즈음 심봉사는 칠순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니 대체 십이년의 세월을 어디서 까먹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심봉사는 나이를 그렇게 먹도록 성욕도 활발하여 현철한 곽씨를 찾으면서도 뺑덕어멈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인물이다.
심청가는 오늘날에 와서는 젊은 세대로부터 공감받을 여지가 그리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작품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면이 있다면 섬뜩할 정도로 자기 파괴적인 청이의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신들은 하느님부터 옥황상제에 이르기까지 왜들 이렇게 쪼잔한지, 인간들을 도무지 가만히 두질 않고, 그 사이에서 인간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낸다. 청이처럼. 그 오래 전에도 이생이 감옥이었던 사람들에게 청이는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