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열다섯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에바 호프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2019년 열다섯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에바 호프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초연 2019년 1월9일~1월20일, 아르코 대극장
재연 2019년 3월28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대본 강남
작곡 김효은
연출 오루피나
음악감독 신은경
안무 채현원

뮤지컬 <호프>의 바탕이 된 실존인물 에바 호페(Eva Hoffe)는 2018년 8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에바 호페의 어머니인 에스더 호페가 백 한 살의 나이로 2007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74살이었었던 둘째 딸 에바 호페는 전세계 문학계를 들썩이게 만든 소송의 주인공이 됐다. 에스더 호페가 두 딸에게 남긴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가 문제였다. 이 원고의 정당한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파헤치는 기사가 이스라엘 언론사 하레츠에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카프카의 친구이자 출판업자이자 유언 집행자였던 브로트는 죽어가던 카프카에게 편지를 받는다. 카프카는 자신의 원고를 소각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브로트는 그 유언을 집행하는 대신 원고를 보관했다. 이후 나치가 프라하에 들이닥치자, 그는 원고를 가지고 이스라엘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에스더 호페를 만나 자신의 비서로 삼았다. 에바 호프의 주장에 따르면, 브로트의 아내가 1943년에 아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에스더와 브로트는 연인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브로트는 1963년에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원고와 카프카의 원고를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에 기증하라고 했지만, 그가 카프카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은 것처럼 에스더도 유언을 따르지 않고 원고를 보관했다. 에스더는 1988년 카프카의 소설 중 가장 유명한 <소송>의 육필 원고를 경매에 내놓아 이백만 달러를 챙기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러한 사연이 언론에 실리자,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은 에바 호페에게 원고의 반환을 요구했고, 에바 호페는 단칼에 거절했다. 길고 지루한 소송이 시작됐다. 그 동안 에바 호페는 “거짓말쟁이에 백만장자, 탐욕스럽고 비정상적이며 무익한 존재”로 전락했다. 호페는 2012년 첫 번째 소송에서 패하고 바로 항소했다. 하지만 2016년 상고심이자 최종심에서도 패했을 뿐만 아니라, 단 한 푼의 보상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에바 호페는 이 판결에 항의하는 의미로 머리를 삭발해버렸고, 자신이 원고를 지키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면 당국에선 강제로 자신을 먹이려 할 거라며 비아냥거렸다. 정작 에바 호페가 암에 걸린 뒤 곡기를 끊자 누구도 단식을 말리지 않았고, 에바는 짧은 투병 끝에 여든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지 카프카가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카프카의 모든 소설을 이스라엘의 유산이자 유대인의 유산으로 삼으려 든 이스라엘 법원은 에바 호페를 탐욕스러운 노인네로 몰아 붙이는 데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어머니가 카프카의 육필 원고를 판 돈으로 조용하고 여유 있는 여생을 살아온 에바 호페는 순식간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부인당했다. 에바 호페는 어머니가 카프카의 원고를 팔아 남긴 유산을 남은 원고를 지키지 위한 소송에 쏟아 부었다. 가장 비싼 변호사를 샀고, 언론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이스라엘 정부의 시오니즘을 비난했다. 

에바 호페의 항의에는 이유가 있었다. 브로트의 사후, 카프카의 작품들은 1882년 브로트에 의해 편집된 버전이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출판됐다. 여기에는 카프카의 하나 뿐인 핏줄이자 조카인 마리안 슈타이너가 금전적인 보상을 한 푼도 받지 않고 개입했다. 카프카 유품의 실질적인 상속자인 마리안 슈타이너의 행적과 에스더 호페의 육필 원고 판매는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호페 모녀를 비난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사실 1888년 에스더 호페가 원고를 팔았을 때, 이미 카프카의 소설은 원형대로 출판된 후였다. 에바 호페가 소송을 당한 2012년은 말할 것도 없다. 호페 모녀가 카프카의 유산을 독점한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비난은 의미가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에바 호페의 성인 독일어 ‘Hoffe’ 는 영어의 ‘Hope’와 같은 뜻으로, 희망이다. 실존인물과 뮤지컬 속의 인물을 구별하기 위해 실존인물은 독일식인 호페로, 뮤지컬 속의 인물은 제목 그대로 호프로 표기했다. 하지만 그 뜻은 같다. 뮤지컬 속 에바 호프가 본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뮤지컬은 에바 호프의 마지막 판결 재판이 있던 날을 다룬다.

줄거리

뮤지컬 <호프>는 동네 미친 여자로 명성이 자자한, 남루한 옷차림의 에바 호프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시작된다. 유명 작가 요제프의 원고를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한 에바의 선고일이다. 원고가 의인화된 캐릭터인 K가 에바의 긴장을 풀어준다. 법원에서는 검사가 에바의 인생을 헤집으며 에바의 탐욕을 지적한다. 에바의 엄마 마리는 프라하가 나치에게 점령당하자 연인인 베르트로부터 요제프의 원고를 부탁받고 피난 트럭에 오르지만, 트럭은 그대로 유대인 수용소로 직행한다.

 베르트에게 원고를 받은 순간부터 딸보다 원고에 집착하며 반쯤 정신이 나간 어머니는 수용소 안에서도 원고를 뺏기지 않고 지켜서 이스라엘에서 베르트와 재회한다. 하지만 베르트는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알리며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에스더는 원고를 돌려주지 않고, 베르트는 이를 빼앗지 못한다. 호프는 끊임없이 마리의 관심을 원하지만 어머니는 점점 멀어져간다. 

호프는 원고가 없어지면 엄마의 관심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홧김에 원고를 경매에 내놓고 큰 돈을 받는 데에 성공하지만, 애인인 카델이 돈을 모두 들고 도망치자 사회와 멀어지고, 어머니마저 죽자 원고와 함께 틀어박힌다. 호프는 죽은 엄마의 코트를 입고 마치 엄마가 원고에 미쳤던 것처럼 원고에 미쳐서는 존재하지 않는 K와 대화를 나누며 K에게 의지해 살아가지만, 결국 마지막 판결에서 원고를 빼앗긴다. 하지만 그걸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잃었던 인생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며, 되돌려 받은 인생을 맛보며 회한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자유를 만끽한다. 

우선 이 작품은 에바와 마리가 남자가 아닌 생존에 관하여, 원고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이들의 대화의 주제인 요제프의 원고가 젊고 잘생긴 꽃미남으로 형상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인 에바 호페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었지만(비록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뮤지컬 속의 에바 호프는 자신이 거의 평생 지니고 있었던 원고를 단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은 인물이다. 만약 에바 호프가 그 원고를 단 한 장만이라도 읽어보았다면 K는 결코 빛나는 꽃미남 왕자님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4월2일, 뮤지컬 <호프> 프레스콜에서 강남 작가는 K를 젊고 매력적인 남성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원고는 모든 등장인물의 욕망이다. 호프는 무엇을 욕망할까, 생각했는데, 내가 아닌 것을 욕망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늙은 여성이 내가 아닌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젊은 남성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다"라고 대답했다. 호프가 자신 만의 환상 속에서 가장 원해 온 인물이 바로 K라고 한다면, 이 작품 속의 호프와 마리가 비록 원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원고’를 과연 남성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호프는 원고의 내용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원고 그 자체가 아닌 원고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할 수도 없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NO

주인공인 에바 호프의 이름은 나름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이브에서 따온, 삶을 뜻하는 '에바'에, 성은 희망을 뜻하는 '호프'다. 하지만 뮤지컬 <호프>속 호프의 삶에는 그 자신의 인생이 보이지 않는다. 호프의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여든 두 살에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되찾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무언가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기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았다면 나이가 몇 살이든 에바는 행운아다. 그렇다면 평생을 지켜왔지만 단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은 그 원고를 빼앗기고서야 찾게 된 인생의 의미란 에바에게 있어서 무엇일까?

실존인물 에바 호페는 죽을 때까지 싸웠다. 카프카의 원고를 뺏어가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통채로 빼앗아가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뮤지컬 속의 에바 호프는 원고를 빼앗기고서야 홀가분한 인생의 자유를 맛본다. 무엇이 더 나은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뮤지컬 속 에바 호프는 실존인물 에바 호페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인생의 여정을 걷는데, 그 여정에 자신만의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호프는 인생은 항상 타인에 얽매여 있다. 특히나 자신의 것도 아니고, 읽어보지도 않았고, 누구도 읽지 못하게 했던 그 원고에게. 어린 시절 에바는 아이에서 소녀로 넘어가는 생일날 소녀를 건너뛰고 익숙하지 않은 어른의 세계로 넘어간다. 어머니가 연인인 베르트에게서 받은 원고를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는 동안 호프는 어머니인 마리를 지키지만, 마리는 고마워하기는 커녕 딸인 호프를 낯설어한다. 그 때부터 마지막 순간, 원고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기까지, 에바의 인생에 자신만의 것은 없다. 에바 호프의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운명은 뮤지컬의 막이 내린 후에 시작되기에.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No

이 작품 안에서 호프의 목표는 생존이다. 프라하에서 도망칠 때, 수용소에서 목숨을 유지할 때, 남자친구로부터 배신당할 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 때, 그 모든 순간에 호프에게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에 죽지 않고 생존할 뿐이다. 그리고 어느새 호프는 생존하되 그 외의 모든 것에 무감해지고,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게 된다. 

호프에게 있어 생존의 목표도, 생존의 목표가 사라지는 이유는 모두 어머니다. 결국 호프의 목표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머니와 평범한 모녀 사이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평범한 것과는 멀리 떨어진 시련을 겪어왔다. 누군가는 그 시련을 통해 더욱 더 가까워지지만, 이들 사이에는 종이뭉치인 베르트의 원고가 끼어든다. 그리고 호프는 어머니를 자신에게서 뺏어갔던 그 원고에 기꺼이 매달린다. 마치 그것이 죽은 어머니인 듯이 매달리는데, 정작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원고의 모습'은 어머니가 아니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인 K다. 

호프의 목표에는 그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 110여분의 러닝타임 가운데 105분여 동안 관객은 호프의 인생 목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단지 호프의 고된 과거의 이야기를 거듭해서 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5분 동안, 관객은 호프가 자신의 인생을 돌려받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호프가 돌려받은 그 자신의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호프는 그 순간부터 무엇을 할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호프는 어쩌면 아침 햇살을 맞으며 여유있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수도 있고, 비로소 K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할 수도 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아주 작은 힌트조차도 없다. 호프가 좋아하는 것, 가지고 싶었는데도 가지지 못한 것, 하고 싶었는데도 하지 못한 것, 호프만의 고유한 취향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호프의 인생은 절망이다. 게다가 호프의 내면에서 끄집어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의인화 된 원고인 K조차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호프가 열망하는 존재가 K라면, 그는 호프의 욕망이 백퍼센트 반영된 존재여야 한다. K를 보자. 젊고 아름답고 상냥한 왕자님 같은 존재다. 늙은 호프가 절규하고 쇳소리를 내며 욕을 할 때, 젊고 아름다운 그는 아름다운 발라드를 부른다. 호프의 외면이 괴짜 노인이라 해도 그 내면은 아름답다는 걸 상징하면 좋겠지만, 사실상 K의 역할은 무대 가운데 젊은 남자 배우를 세워놓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실존인물보다도 심한 시련을 겪은 호프의 인생만으로는 110분짜리 무대를 장악할 힘이 모자라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but...

실존인물이었던 에바 호페가 프라하를 떠난 것은 다섯살 때였다. 엄마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극 중의 호프는 그보다는 나이가 많다. 소녀인 호프에게는 자상한 어머니 마리와의 일상이 전부다. 베르트의 애인으로 처음 등장한 마리는 베르트와의 데이트도 미루고 호프의 생일을 챙겨주던 자상한 엄마다. 마리에 대한 정보는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 다음 장면에서 마리는 베르트로부터 요제프의 원고를 부탁 받고 돌변한다. 전 장면에서 그토록 호프에 대한 애정을 보였던 사람은 사라지고, 원고를 품에 안는 순간 마리는 이미 반쯤 미친 상태다. 

우리는 왜 마리가 미쳐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유일한 단서는 사랑하는 사람인 베르트가 자신보다 원고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뿐이다.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도 마리는 원고를 들키지 않고 지키는데,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판타지는 K의 존재가 아니라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 작가의 원고를 들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카프카와 함께 살았던 마지막 연인 도라 디아만트조차 카프카와 나눈 모든 편지와 보관하고 있던 모든 원고를 게슈타포에게 압수당했고, 아직도 이 원고의 행방은 묘연하다. 가지고 들어간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알몸으로 수색을 당한 뒤 소름 끼치는 줄무늬 수감복을 입어야 했던 그 수용소에서 마리는 원고를 들키지 않는다. 입 안의 금니까지 뽑아냈던 그런 곳에서. 

어쨌든 마리는 그 원고 때문에 미쳐가고, 에바는 그런 마리의 보호자 노릇을 하며 다른 사람을 밀고해 죽게 만들면서까지 엄마를 지킨다. 마리는 그런 에바를 소름 돋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호프는 이런 경험을 하며 누구보다도 단단해지지만, 이스라엘에 도착해 카델과 만났을 때 호프는 마치 과거는 모두 잊은 듯 순진한 사람으로 변신한다. 가족을 모두 잃은 카델도 호프도 아무 죄도 없이 끔찍한 경험을 했건만, 두 사람은 극명하게 다른 변화의 모습을 띈다. 호프는 카델에게 모든 걸 맡기고 의지하려 드는 반면, 카델은 누구도 믿지 않고 성공을 위해 이용할 뿐이다. 울부짖는 호프를 뒤로 하고, 카델은 아직도 팔 수 있는 원고가 남아있지 않냐는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고 사라진다. 에바 호프라는 캐릭터는 플롯에 의해 배신 당하고 버림받기를 거듭하기 위해 주어진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단단해지지 않고, 여전히 처음처럼 상처를 입는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but...

호프가 직접적인 연애 관계를 통해 내린 결정은 어머니가 지닌 원고를 몰래 가져다 카델과 함께 팔아버리기로 했다는 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 외 다른 결정에 있어서도, 호프가 자신의 의사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선택하는 것은 없다. 아직 어릴 때는 엄마와 함께 피신을 가다 그대로 수용소로 직행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어머니에게, 그 이후에는 원고에 매인다. 

심지어 원고를 의인화하여 원고와 대화를 하는데, 그 원고는 그동안 등장했던 어떤 누구와도 공통점이 없는 붕 떠있는 존재인 K다. 그의 존재에 대한 힌트는 극중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호프는 대체 얼마나 큰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일까? 

실재했던 사건에 따르면 원고를 판 사람은 엄마인 에스더 호페고, 그는 딸인 에바 호페가 74살이 될 때까지 건재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에바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뮤지컬 속 호프에게는 돈도 엄마도 없다. 그래서 애잔함과 동정심을 더욱 자아내는 캐릭터가 된다. 

호프의 가장 큰 결정은 마지막 재판에서 이스라엘 정부를 뒤에 업은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에게 원고를 내줘야 한다는 판결을 들을 때다. 원고를 뺏기는 그 순간에서야 호프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매여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옭아맬 수도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호프에게서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호프는 평생 원고와 함께 했을 터였다. 호프는 자신의 발로 K를 떠나지 못했다. 

어쨌든 호프는 자의 반 타의 반, K와 작별한다. 자신의 평생을 좌우했으면서도 한 글자도 읽지 않은 그 원고를 떠나,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그게 무엇이면 무슨 상관이며, 호프가 몇 살이면 무슨 상관인가. 원작의 호페가 머리를 박박 밀고 원고가 자신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했을 때, 뮤지컬 속의 호프는 그 원고를 자신의 인생 밖으로 보낸다. 이 차이는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뮤지컬은 호프가 자신의 발로 인생을 걸어가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호프는 이 '미션'에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이다. 호프는 어쨌든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과 달리 K를 더 이상 고립시키지 않는다. 원고는 세상으로 나아가 읽히게 되고, 호프에게는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모든 등장인물에게 주어졌던 가학의 굴레에서 호프는 끝내 벗어난다. 하지만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호프는 발전한다. 분명히 발전한다. 하지만 그 발전은 극 중 마지막 5분 간에 드라마틱하게 일어난다. 이전의 호프의 82년 간 인생 전체는 그야말로 과거의 고통 속에 목까지 잠긴 채로 정체된 인생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목숨을 위해 타인을 고발해 죽음으로 밀어부치고, 어머니의 원고를 훔쳐 팔고, 자신을 학대하고, 그리고 스스로를 원고의 존재에 기대에 위로한다. 

호프는 원고를 단 한 글자도 읽지 않았기에, K의 언어는 완전히 호프 그 자신의 언어여야만 한다. 누군가 자신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말,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배려해 주었으면 했던 바로 그런 행동을 K가 호프에게 보여준다. 즉, 호프는 원고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내내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행여 K가 호프 내면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들려줄 때, 호프만큼 K도 외롭다는 걸 알면서도 잡아둘 때 역시 그 모든 언어는 호프 자신의 언어여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심 재판의 선고문을 통해 호프는 원고를 빼앗김과 동시에 원고를 떠난다.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던 나날들로부터 떠난다. 

그런데 이 K의 흔적을 뮤지컬 속의 에바 호프에게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어떤 힌트조차도 없다. 게다가 이 뮤지컬의 부제에 따르면, 호프의 인생은 마치 '읽히지 않은 책'인 K처럼 '읽히지 않은 인생'인데, 호프의 인생이 왜 타인으로부터 읽히지 않았는가? 단지 칩거하며 타인과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타인들은 그러한 모습도 호프라고 읽는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들이 오독을 한 것도 아니다. 호프는 '읽히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이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기만을 그 자리에서 고치처럼 오랫동안 웅크리고 기다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의 삶을 읽지 못한다. 호프는 자신이 그토록 천착했던 원고를 읽지 않았다. 마치 읽으면 자신의 환상이 깨질 것임을 알기라도 했듯이. 원고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 호프의 인생은 스스로 원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재판만이 호프를 원고와 K에게서 떼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계기였다. 동네의 미친 여자라고 읽히던 호프는 자신의 책장을 스스로 쓰기로 결심한다. 타인의 원고도, 거기에 의지해서 만들어낸 K도 필요 없이. 

그 발전의 과정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를 떠나서, 호프의 발전은 이 작품이 지닌 많은 애매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가장 큰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작품은 호프의 발전, 호프의 인생 찾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종합 별점 ★★

어떤 희망을 찾고자 했나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니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오히려 여실히 부실했던 인물이 자기만의 납득할 수 있는 길을 따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충실하게 관객에게 보여준다면, 그 인물이 우유부단하거나 세상 누구보다 사악한 인간이라 해도 충분히 한 명의 인물로서 개성을 뽐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인물이 작품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고 자신만의 분명한 취향과 지향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관객의 입장에서 매우 즐거운 일이다. 

호프는 그러한 면에서 양가적인 측면을 지닌다. 호프는 분명히 동정 받아 마땅한 과거를 지니고 있지만, 그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용서받으려 한다. 과거에 자신에게 고통을 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꼭 용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치의 만행이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류가 모두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같을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과거의 힘들었던 일들이 미래의 내가 저지를 나쁜 행동을 용서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흑인들이 과거에 백인들에게 노예로 끌려와 여전히 차별 받고 있다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백인을 죽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고통을 늘어놓고 자신의 현재를 덮으려 하고 면죄부라도 되는 양 흔들어댄다. 그리고 그 면죄부를 가장 오랫동안 소름 돋게 흔들고 있는 것은 시오니즘을 앞세운 이스라엘 정부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아 이천년도 전에 사라진 자신들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여 없애야 할 바퀴벌레같은 존재처럼 몰고, 미사일을 쏜 다음 죽어가는 그들을 보며 샴페인을 터트린다.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때 그들이 하는 말은 자신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갈 때 어디 있었냐는 질문이다. 이들은 현재에 벌이는 만행을 과거의 나치가 자행한 만행으로 덮으려고 한다. 시오니즘의 끔찍함은 자신들이 타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고 믿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과거의 고통이 발생했다고 믿으며, 과거의 고통을 미래의 악행에 대한 면죄부로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역시 자신이 당한 일을 타인에게 똑같이, 혹은 더 잔혹하게 행하면서도, 과거의 고통을 깃발처럼 흔들며 이해받기를 원한다. 베르트는 마리를 버리고, 현실의 브로트는 카프카의 원고를 자기 마음대로 난도질하는 것으로 카프카를 두 번 죽인다. 호프의 남자친구 카델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다 진한 사연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받을 수는 없다. 

호프의 면죄부에는 엄마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엄마라는 존재는, 예외도 있고 정도는 달라도, 대부분 사람들의 눈물 버튼인 편이다. 뮤지컬 속에서 에바 호프와 그 어머니인 마리가 '원고‘에 자행하는 고립은 용서받기 어렵다. 우선 그들은 원고의 주인도 아니다. 어머니는 떠나버린 베르트 대신에, 에바 호프는 그 어머니 대신으로 원고를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카프카의 원고를 자기 마음대로 편집하고 해석을 더해 세상에 내놓았던 현실의 브로트와, 원고를 끌어안고 공개하지 않았던 호프 모녀 둘 중 누가 더 이기적이고 나쁜지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거기에 카프카는 위대한 유대인의 유산이라며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카프카의 나라‘라는 타이틀을 원하는 이스라엘의 뻔뻔한 태도 역시 만만치 않다. 

K는 어디서 왔는가?

하지만 이 뮤지컬은 그러한 모든 맥락을 생략한다. 호프가 어머니를 상실한 것에만 집중하고, 그래서 원고를 오랜 기간 독점한 데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고, 마치 이스라엘 정부가 원고와 함께 사이좋게 여생을 사는 노인을 불러내 괴롭히려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한 편으로는 문학계만이 아니라 인류의 자산일 수도 있는 원고를 독점하고 그 소중한 물건을 독점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려는 이기적인 에바 호프가 거기 있다. 사실은 원고를 빼앗아 가려는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 역시 인류의 자산을 독점하겠다는 의도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름이 없으며, 실제로는 원고가 공개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보다도 더 나쁘다. 

게다가 그 원고는 자상하고 친절한 꽃미남 K로 등장한다. 그는 호프와 무대를 양분할 뿐만 아니라, 미친 할머니 호프가 쇳소리로 고함을 내지를 때 아름다운 미성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독점한다. 과연 이 작품의 중심에는 호프가 있는가, K가 있는가? K의 비중이 이토록 크기 때문에 끊임없이 "K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 답은 이 작품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K는 한 때 상냥했던 어머니를 닮지도, 한 때 다정했던 남자친구를 닮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인물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를 위로하는 존재가 이 뮤지컬 안에서는 ’왕자님‘이다.

차라리 머리를 밀어버린 현실의 에바 호페가 그리워질 지경이다. 뮤지컬 속 호프는 그 왕자님의 축복을 받으며 자신의 인생을 찾아 간다. 결국 이 작품도 뮤지컬 <마리 퀴리>와 똑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여성을 구원하는 것, 여성이 원하는 것은 ’왕자님‘이라는 공식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정, 여성을 구원하는 것은 젊고 매력적인 남자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절망으로 가득 찬 호프에게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실존인물 에바 호페는 죽은 뒤 어머니의 관 위에 묻혔다. 뮤지컬 속의 호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응님의 글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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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뮤지컬 속 여성

01

2019년 첫째 주, 마리 퀴리

02

2019년 둘째 주, 엘리자벳 폰 비텔스바흐

03

2019년 셋째 주, 오목

04

2019년 넷째 주, 클레어

05

2019년 다섯째 주, 알렉산드라 오웬스

06

2019년 일곱째 주, 그레첸

07

2019년 여덟째 주, 제루샤 '주디' 애봇

08

2019년 아홉째 주, 메리 포핀스

09

2019년 열번째 주, 핑크 레이디

10

2019년 열한번째 주,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11

2019년 열두번째 주, 아랑

12

2019년 열세번째 주, 샬롯 드 베르니에

13

2019년 열네번째 주, 나팔, 혜란, 이은숙

14

2019년 열다섯번째 주, 에바 호프

현재 글
15

2019년 열여섯번째 주, 1976 할란카운티의 여성들

16

2019년 열일곱번째 주, 앤 보니, 메리 리드

17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1) 마법에 걸린 사랑

1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2) 바그다드 카페

19

2019년 스물한번째 주, 빨래

20

2019년 스물두번째 주, 자스민

21

2019년 스물세번째 주, 심청

22

2019년 스물네번째 주 안나 아르카지예브나 카레니나

23

2019년 스물다섯번째 주, 조왕, 덕춘

24

2019년 스물여섯번째 주, 테레즈 라캥

25

2019년 스물일곱번째 주, 음악극 <섬>

26

2019년 스물여덟번째 주, 기네비어와 모르가나

27

2019년 스물아홉번째 주, 허초희

28

2019년 서른번째 주, 강향란, 차순화

29

2019년 서른한번째 주, 진

30

2019년 서른두번째 주, 개비, 바비, 도나, 울리

31

2019년 서른세번째 주, 록산

32

2019년 서른네번째 주, 옹녀

33

2019년 서른다섯번째 주, 엠마 커루

34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3) 갓 헬프 더 걸

35

2019년 서른여섯번째 주, 마리 앙투와네트

36

2019년 서른일곱번째 주, 베스

37

2019년 서른여덟번째 주, 그 여자

3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4) 호커스 포커스

39

2019년 마흔세번째 주, 루미 헌터

40

2019년 마흔다섯번째 주, 아드리아나와 엘로이즈

41

2019년 마흔여섯번째 주, 레베카 드 윈터스

42

2019년 마흔일곱번째 주, 아이다

43

2019년 마지막 주, 암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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