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극 <섬>
“비극은 사람을 소외시켜.” 연극 <너에게>에서 아이를 잃은 모건은 씹어 뱉듯이 말한다. 수잔 손택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타자화하고 터부시 하는지를 말했었다. 근본적으로는 타인의 아픔이 자신에게 전염될까봐 도외시한다. 고통에 공감하기 보다는 외면하는 게 편하다. 외면하고 난 후에는 비난하고 나면 더 맘이 편해진다. 그래서 결국은 고통을 지닌 개인 혹은 집단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우고 자신으로부터 멀리 격리시킨다.
대부분의 인간이 외면을 통해 자신의 일상의 편안함을 지키려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로 타인의 고통에 깊숙하게 파고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 작품 <섬>의 주인공인 마가렛이나 마리안느처럼, 혹은 그 유명한 테레사 수녀처럼 혹은 백의의 전사였던 나이팅게일처럼. 지나간 비극과 그 비극 속으로 뛰어든 인간의 모습은 찬연하게 아름답고 타인의 귀감이 되지만 현실의 고통은?
음악극 <섬>은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일정 부분 유효했고 어느 부분에서는 아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 정운선과 백은혜가 보여주는 두 수녀의 모습은 분명히 뭉클하게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린다. 뮤지컬 다큐멘터리라는 독특한 시도는 ‘음악극’이라는 명칭 뒤에 숨어서 때로는 영리하게, 때로는 무리수를 두면서도 분명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줄거리
이야기는 세 가지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3년부터 1948년까지의 소록도에서의 백수선의 이야기, 1966년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도착해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 2009년에 발달장애아를 낳은 고지선의 현재까지의 이야기다.
스물도 되기 전에 한센병 환자가 된 백수선은 소록도의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소록도를 찾아온다. 천국 같은 곳이라고 듣고 왔지만 지옥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백수선의 연애와 탈출, 출산, 아이와의 이별,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소록도는 연애도 하고 선물도 받으며 ‘바깥’의 사람들과 같은 일상을 이어나는 곳이다.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지낼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침마다 가루우유를 따뜻하게 타서 환자들에게 먹이며 기운을 북돋고, 편견과는 다른 한센병의 실체를 알리고,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고 맨손으로 만지고 치료하며 누구보다도 그들에게 가까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가 먹어 할머니가 되자, 편지 한 장을 남겨 두고, 가방 하나 들고 들어왔던 그 때처럼 가방 하나를 들고 떠난다.
그리고 현대에는 발달장애 아이를 둔 고지선이 있다. 그는 아이가 없었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던 직장여성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불편한 시선을 보내왔던 바로 '그런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에 절규한다. 하지만 이내 아이를 ‘남과 같이’ 살 수 있게 키우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아이의 교육에 쏟는다. 그가 사는 지역의 주민들은 특수학교의 설립을 반대한다. 왕복 네 시간 거리의 학교에 아이를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공연의 마지막은 음악 없이 학교 건립을 찬성하는 부모들과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간의 공청회다. 날 것 같은 날 선 목소리들이 칼날처럼 오갈 때 고지선은 외친다. 사람들은 익숙해지면 받아들이지만 익숙해지지 않아서 외면한다면서 익숙해질 기회를 달라고, 그러려면 봐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그 타인이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든 여기지 않든, 그것을 고통이라고 외면할지도 모르는 나 혹은 당신이.
그 섬에 사람이 산다
이 작품은 문제없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 두 수녀 마리안느와 마가렛만으로도 거뜬한데, 거기에 고지선과 그의 친구들, 그의 언니가 등장해 이야기를 나눈다. 하다못해 소록도에 들어와 연애하고 아이를 낳는 백수선도 그러하다.
음악극 <섬>에서는 마리안느, 마가렛, 백수선, 고지선이 모두 주인공이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한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을 각각의 항목에, 그리고 마지막 발전의 항목에는 모두를 적용하여 다루려고 한다. 실제로 마가렛의 한국 이름이 고지선, 마리안느의 한국 이름이 백수선이었다. 상냥하되 고집이 있었던 마리안느의 한국 이름은 소록도에서 사랑을 키워가는 인물로 등장했고, 조용했지만 싸울 때는 싸우던 마가렛의 한국 이름은 발달장애아의 엄마인 고지선이 됐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but ...
백수선
가상의 인물인 백수선은 열여덟에 소록도에 들어와 몇 년 뒤 자신보다 어린 청년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진다. 백수선의 과거는 알 수 없다. 한센병에 걸린 뒤 사랑을 한다든가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했었던 그였지만 일단 사랑에 빠지자 뒤 돌아보지 않고 돌진한다.
백수선이 상징하는 것은 ‘순수함’이고 그에게 주어진 시련 가운데 한센병은 일부다. 어쩌면 진짜 고통은 사랑했던 남자를 떠나보내고서(이 과정은 매우 모호하다) 홀로 자식을 낳은 뒤, 병이 옮을까봐 생이별을 한 후 잠깐의 만남만이 허락되던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백수선이 섬으로 돌아온 뒤의 삶은 딸인 영자의 묘사로만 잠깐 지나갈 뿐이다.
극 속에서 백수선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 역시 사람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는 사랑도 육아도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백수선은 평범한 모든 일들이 평범하지 않게 일어나는 곳임을 보여주는 운명과 사명을 가지고 극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다.
하지만 백수선은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거나 주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백수선은 '순응'한다. 이 태도는 제 발로 소록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그 순간부터 이미 결정지어진 것이다. 다만 그는 침묵하지 않는다. 딸에게 소록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남김없이 들려주고 기억하게 한다. 그것이 백수선이 할 수 있었을 유일한 일이지만, 우리는 안다. 침묵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마가렛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간호학교를 졸업한 마가렛은 마리안느보다 먼저 소록도에 도착했다. 그가 왜 소록도에 계속 머물겠다고 결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내면의 무엇을 소록도가 건드렸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소록도에서 만난 환자들에 대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민과 애정에 대해 그는 이유를 분석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실존했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이 매력적인 이 인물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웃음이 나오지 않는 극에 활기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다만 마가렛의 에피소드는 전체의 분량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 마치 이들의 인생을 다룬 극처럼 홍보됐지만, 사실 마가렛과 마리안느의 부분은 과거의 스케치이자 큰 틀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이들의 거침없는 행동과 일화가 더 궁금했을 관객들에게는 목마름이 남는다.
마가렛의 목표와 신념은 종교를 기반으로 한 인간애의 실천이다. 마가렛은 무조건 사랑하지도 않았고 무조건 치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믿어주는 사람 없던 한센병 환자들을 무조건 믿어준 것은 마가렛과 마리안느 뿐이었다. 이들은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이 신념을 통해 움직이고, 한치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But...
고지선
마가렛의 한국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고지선은 어찌 보면 전형적인 슈퍼우먼 컴플렉스를 가진 인물이다. 고지선은 아이가 한 돌이 되어서야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받아들인다. 고지선은 자신이 그동안 발달장애 아동들에게 던져왔던 차갑고 편견 어린 시선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깨닫고 인과응보라며 절규한다. 그리고 이 때 고지선이 왜 치는 “왜 나야!” 라는 말은 장애가 있는 아이의 부모가 지니는 일차적인 감정일까?
장애를 지닌 아이의 시점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늘, 그 아이를 돌보는 부모 중 특히 어머니의 고통에 사람들은 시선이 쏠린다. 고지선 역시 그러한 시선의 주인공이 된다. 아이는 모자(hat)로 표현될 뿐이다.
한국에서 장애인은 투명인간 같은 존재다. 장애인은 나가 돌아다니지 못한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연민을 보일 때는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고지선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아이가 발달장애아기 때문이다.
고지선은 창작팀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무대에 등장하는 시간은 네 주인공이 비슷하지만, 고지선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고지선이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소리를 지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일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위해서.
고지선은 변한다.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역에 특수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애쓴다.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의 과거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아이의 장애를 자신에 대한 형벌이라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아이가 장애가 있음에도 살아갈 수 있기 위해 투쟁하는 인물이 된다. 다만 문제라면 이 모든 것이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제가 과연 어떤 경우에도 사회의 다수가 되지 않는 장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합당한 전제일까? 다행인 것은 최소한 음악극 <섬>의 관객들은 간접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But ...
마리안느
마리안느의 어떠한 결정에도 연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애정이 그의 결정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신, 그리고 환자들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같다. 이 작품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성녀처럼만 다루어진다. 이들은 모두가 외면하던 한센병 환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마스크도 하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고름을 짜고 치료를 감행해서 환자들이 더 걱정하게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이들이 가끔 보여주는 화내는 모습이나 걱정하는 모습은 이들을 더욱 더 천사같은 존재로 만든다.
창작진들은 이 두 사람을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다룬다. 그들에게도 실수와 미움과 전력으로 싸운 대상이 분명히 있었을테지만 이들은 한결같은 웃음을 머금은 존재로 소록도에 들어와 소록도를 떠난다. 음악극 <섬> 안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역할은 두 명의 성녀 마리아인 것일까?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No, But...
마가렛, 마리안느, 백수선, 고지선
작품 속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발전은 거의 볼 수 없다. 이들은 이미 완성된 존재로 섬에 들어와 섬을 완성시킨 후 떠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고지선과 백수선을 통해서 발전을 그릴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두 사람 중에 ‘변화’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사람은 고지선이다. 고지선은 그 자신이 겪은 일을 통해 내면이 변한다. 거기다 일면식도 없던 타인들의 시선을 조금씩 돌려놓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고지선의 변화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 때문이다. 장애는 (마치 한센병처럼) 전염성이 전혀 없지만, 사람들은 남과 다른 것을 불행으로 감지하고 거기에 옮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고지선은 자신에게 ‘불행’이 주어지자 그제사 깨닫는다. 지선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외면하고픈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가족들에게서, 너의 마당에 있으면 훌륭하지만 내 뒷마당은 안된다는 님비 이웃들에게서 시시각각 느낀다. 고지선은 변한다. 발전했는가? 그것은 미지수다.
음악극 <섬>은 고지선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어찌 보면 소록도의 두 수녀의 이야기는 이용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소록도의 이야기가 훨씬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려지지만, 실제로 창작진이 하고 싶은 말은 고지선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과거의 드라마는 감동이지만 현재의 드라마는 외면하고픈 현실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고지선을 그토록 소리 지르는 여성으로 설정한 것일까?
하지만 고지선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창작진의 시각은 과연 고지선에게 아이를 ‘시설에 보내라’고 훈수 두던 고지선의 언니, 오빠와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을까? 최근 미국의 뮤지컬계는 장애를 돌보는 주변인이 아니라 그 장애를 지닌 사람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보는 쪽으로 개입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이 작품은 장애를 지닌 아이 엄마의 고통에만 치중하고 있다. 무대 위에 한센인은 존재해도 장애아 당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수녀와 두 여인의 인생을 통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하다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네 사람의 이야기는 치밀하건 아니건 울림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