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오냐, 옹녀
어서 가자!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오냐’의 첫 번째 사용법은 아랫사람의 부름에 대답하는 말이고, 세 번째 사용법에 따르면 어떤 사실을 긍정하거나 다짐할 때 하는 말이라고 되어있다. 이를테면, ‘오냐, 두고 보자!’처럼.
열다섯에 맞이한 첫 신랑부터 줄줄이 죽어 나가 마을 남정네 씨가 마를 판에 이르러 태어나 살던 마을에서 쫓겨난 옹녀가 파랑 보따리를 거머 쥐고 서글피 울기는커녕 보란 듯이 잘 살겠다며 썩 나설 때에 옹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오냐, 옹녀, 어서 가자!’다.
원작인 <변강쇠전>의 사실상 주인공은 옹녀다. 이야기가 옹녀로 시작해서 옹녀로 끝나기도 하거니와, 변강쇠는 옹녀를 거쳐간 수많은 남정네들 가운데 유일하게 속궁합이 맞은 인물일 뿐이다. 변강쇠전의 앞전은 변강쇠를 만나기까지의 옹녀 이야기라면 변강쇠전의 후반부는 변강쇠가 죽은 후 상을 치르는 옹녀의 이야기다. 물론 그 동안 내내 옹녀와 어떻게든 한 번 해보려는 남정네들이 줄줄이 죽어나간다.
옹녀는 팜므파탈이지만 그 인생이 꼭 즐겁다고 할 수는 없는데, 당차게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은 옹녀가 국립창극단에서 올라왔다. 2014년에 초연한 이후 수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으면서 매년 공연을 올리고 있는데 그 인기가 마당놀이의 인기에 맞먹을 정도다. 질펀한 욕설과 거르지 않은 화끈한 입담에 거침없이 웃고 추임새를 넣는 ‘열린’ 관객들이 다 어디 숨어있었나 싶다.
줄거리
부모 없이 자란 옹녀는 열다섯이 되어 첫 혼인을 올린 후 고향인 평안도 월경촌의 골칫거리가 된다. 맞이하는 남편마다 하룻밤을 못 넘기고 죽어나갈 뿐만 아니라 옹녀를 어떻게 해보려거나 연심을 품은 사람들도 급사하기에 이르자 급기야 옹녀는 마을에서 쫓겨나 남쪽으로 향한다.
반대로 남쪽에서는 눈 맞는 여자마다 매달리는 변강쇠가 북으로 향하다가 외나무다리처럼 좁은 길 위에서 딱 마주친다. 좁은 길 위에서 나온 것과 들어간 것이 딱 맞아들어가자 두 사람은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해 부부의 연을 맺는다. 변강쇠의 양기는 옹녀의 청상살과 상부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눌러버리고 옹녀는 기뻐하여 변강쇠가 가는 곳마다 도박으로 돈을 날려도 그저 뒤태만 봐도 좋다며 행복해 한다.
결국 마을에서는 살 수 없게 된 그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해오라고 보낸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와 장승 동티가 들고 말았다. 변강쇠는 죽어 장승이 되어버린다. 옹녀의 꿈에는 세상을 떠난 어미가 나타나 옹녀의 내력을 얘기해 주는데, 전란 통에 남편이 성 쌓다 죽었다는 소식이 닿자마자 온 동네 남정네들이 욕정받이로 어미를 이용해 먹고 낳은 딸이 옹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면 남자들에게 복수를 해달라는 소원을 삼신어미가 들어줘서 옹녀는 청상살과 상부살을 타고난다.
이미 변강쇠는 죽었는데, 옹녀는 남편을 돌려내라며 장승들을 자신의 청상살로 불태우며 온 산을 헤집고 다닌다. 결국 장승들의 수장인 대방장승이 옹녀와 담판을 지으러 찾아온다. 옹녀는 자신도 장승으로 만들어 달랬다가 욕정도 없이 서 있어야 한다는 말에 단박에 장승살이를 거부하고 나무로 깎은 성기로 욕정을 달래며 뱃속에 들어앉은 아이를 혼자 잘 키우리라 결심한다.
<변강쇠전> 혹은 <가루지기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의 원작과 국립창극단이 새로 올린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사이에는 각색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다. 원작에는 어미가 등장하지 않으며 옹녀 탄생의 전사도 없다.
옹녀는 음기의 상징이고 변강쇠는 양기의 상징이다.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 장승 동티가 들어서 세상 온갖 병을 다 겪고 눈을 부릅뜨고 죽는 것은 원작과 창극이 같지만, 이후 줄거리는 원작과 다르다. 원작에서 옹녀는 죽은 방에서 꼼짝도 않는 변강쇠의 장례를 치르고 그 김에 새 남자를 얻어볼 요량이다. 그런 옹녀에게 반해 시체 치우러 왔다가 자신도 시체가 되어 그 옆에 눕는 남자들이 줄줄이 늘어난다. 결국 각설이패의 도움을 받은 뎁득이가 장례를 치르는데 성공하지만 목숨이 아까워 내빼면서 옹녀는 다시 혼자가 된다.
하지만 새로이 만들어진 창극에서는 옹녀와 변강쇠가 첫 거사를 치르는 장면에서부터 장승들이 등장해 옴짝달싹 못하는 그들의 신세를 탓한다. 장승들은 2막에서 꽤 중요하게 재등장해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한다.
장승들의 저주로 죽어서 장승세계로 편입된 변강쇠는 옹녀와 꿈에서라도 다시 보기 위해 장승계 일인자인 대방장승의 아내 대방여장승의 욕정을 채워주느라 여념이 없고, 옹녀는 남편을 돌려받기 위해 장승들 앞에서 옷고름을 활짝 풀어 헤친다. 옹녀의 정념에 나무로 만들어진 장승들을 활활 타오르고, 심지어 장승으로 서 있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장승들은 차라리 옹녀에게 농락당하고 죽는 게 낫다며 너나 없이 옹녀 앞에 마른 장작 같은 몸을 던진다. 이번에 새로 추가된 장면에서는 놀랍게도 옹녀가 ‘바바리맨’을 연상케 하는 푸른 트렌치 자켓을 열어 젖힌다. 이 새롭게 추가된 부분 때문에 머릿속이 다소 착잡해졌다.
이 작품 속에 이름이 주어진 여성은 옹녀 한 명 뿐이지만 원작에는 없는 내력을 읊는 죽은 어미가 등장해 대화를 나눈다. 물론 이 둘이 나누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변강쇠 이야기이긴 하지만, 옹녀가 탄생하게 된 내력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덕분에 비록 어미 이름은 없어도 간신히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배우이자 소리꾼인 이소연이 거침없이 당당하게 무대 위에 등장해 무대 한가운데 사뿐 앉아 고개를 들며 ‘옹녀, 문안이오!’를 말할 때 이미 옹녀의 캐릭터는 완성된다.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이자, 눈을 내리깔기 보다는 똑바로 상대를 마주 보는 인물이다.
그 누가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웅녀보다 노력할 것인가. 옹녀는 죽은 어미가 꿈에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겪어서 알고 있다. 자신과 섹스를 하는 남자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하다못해 옹녀에게 눈길만 줘도 남자들은 죽어나갔다. 옹녀가 남자를 탐하지 않았고 남자들이 옹녀를 탐했지만, 그들이 죽어나갔다는 이유로 단죄를 당하는 쪽도 옹녀다.
옹녀는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쫓겨나면서 말한다.
오냐, 옹녀 어서 가자!
보란 듯이 잘 살아보겠다며 마을을 떠나는 옹녀는 자신을 쫓아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변강쇠를 만나 천생연분을 만났다는 사실에 그가 아무리 도박을 하고 안정을 찾지 못해도 뒤태만 봐도 좋아 죽는다.
그렇다고 마냥 섹스만 하며 대책없이 사는 것도 아니다. 둘 중 먼저 정신을 차리고 먹고 살 길을 도모하는 것도 옹녀다. 마을에서 쫓겨나기를 반복하자 산에 들어가서 둘이 살자고 제안하는 것도 옹녀다. 옹녀는 삶의 개척자이자, 안주하지 않는 자다.
그런 옹녀가, 그토록 짝을 찾기를 원하는 옹녀가, 외로운 삶을 거부하는 옹녀가 마지막에는 독수공방을 선택한다. 그의 뱃속에 자식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들어앉는 것도 원작에는 없는 설정이다. 결국, 옹녀를 ‘길들이는’ 존재는 자식이다. 옹녀는 꼭 길들여져야 했을까? 원작에서 한없이 열린 결말로 새 변강쇠를 찾으러 떠났던 옹녀는 어디로 갔을까?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but...
옹녀의 목표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물론 옹녀에게는 이것이 지독하게 어렵다. 애당초 조선시대의 평민인 여성에게 있어서 ‘평범’은 무엇일까? 남자 만나 해로하는 것이겠지만 이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이 옹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작가인 고선웅은 옹녀에게 지독한 전사를 선사한다. 겉으로 보면 옹녀의 어미가 옹녀의 몸을 빌려 자신을 허락도 없이 범한 남자들에게 복수하는 형태를 띠지만, 실제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옹녀 그 자신이다. 자신의 욕망을 풀 수도, 바라는 평범한 인생을 누릴 수도, 어딘가에 정착을 할 수도 없다.
옹녀는 조선시대의 마녀다. 게다가 국립창극단의 점 찍고 돌아온 옹녀는 장승들마저 활활 태워버리니 그만한 음력이 어디 있을까. 평범한 인생을 꿈꾸던 옹녀에게 흔치 않은 목표와 신념이 생기는 것은 변강쇠가 장승 동티가 들어 죽어 나갔을 때다. 청상살이 지독하니 남자를 어디 가서 다시 얻기가 죽기 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아는 옹녀는 죽은 남자를 되돌려 받을 각오를 한다.
문제는, 이렇게 돌려받기 위한 옹녀의 행위를 2019년 버전에서는 바바리맨과 동일시 하는 데 있다. 아무리 옹녀가 장승을 태우기 위해 옷깃을 여는 행위가 바바리맨을 연상케 한다 해도 실제로 ‘바바리’를 입혀 무대에 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두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나는 옹녀가 자신의 남편을 되돌려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신계의 장승들과 벌이는 한판승을 동의 없이 욕망을 채우는 바바리맨에 비교하면서 옹녀를 한갖 범죄자와 동일시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보이는’ 행위 자체를 어차피 서로 좋은 행위라고 작가가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다. 바바리맨이 범죄자가 되는 이유는 그의 기습적인 성기 노출을 그 대상인 여성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훔쳐 보는 범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내 것도 보라고 쉽게 말하곤 한다. 2019년, 느닷없이 바바리맨으로 변신한 옹녀를 볼 때 드는 복잡한 감정이 바로 이 때문이다. 옹녀의 노출과 바바리맨의 노출을 같은 선상에 놓고 그것을 유머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옹녀의 캐릭터는 초지일관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한다. 원작의 옹녀는 아이가 없어도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변강쇠를 장례 치르는 김에 새 신랑을 얻을 궁리를 하는 인물이다. 새로운 옹녀의 삶의 이유는 임신이다. 보통은 점을 찍고 돌아오면 좀 더 자극적인 인물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2019년에 점을 찍은 옹녀는 이전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가정적이고, 여성적이며, 없던 모성애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평생 수절을 맹세하고 성기 모양의 나무를 깎아 남편을 대신한다. 천하의 옹녀가 열녀가 됐다.
점 찍고 돌아온 옹녀의 변강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1막이 있기에 2막의 수절하는 옹녀도 납득할 수 있다. 단지, 옹녀가 열녀로 변신하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하기사 섹스를 할 때마다 송장을 치를 바에야 수절을 하는 편이 마음은 편할 것이다. 양기가 가득한 변강쇠는 온 세상 여자를 다 후리고 즐거운 하룻밤을 보내건만, 옹녀는 아무리 음기가 강하고 하늘이 내린 성기를 가진들 뭣에 쓴단 말인가. 여성의 음기가 그토록 무서운 시대였을까? 욕망하는 여성은 쳐다보기만 해도 죽음의 위기를 불러올 정도로?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but...
옹녀의 모든 결정은 변강쇠와의 삶을 위해서다. 변강쇠가 다른 남자들처럼 죽지 않고 자신의 곁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변강쇠가 도박에 빠지고 제대로 된 일도 하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만 일으켜도 옹녀는 세탁일을 하면서 변강쇠 뒷바라지를 한다. 이들의 떠도는 인생을 유랑민의 한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내용을 들어보면 전적으로 변강쇠의 게으름과 무지 때문이다. 옹녀는 자신보다 못 배운 변강쇠를 모두 이해해 주지만, 변강쇠가 그런 상태로 짧은 평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남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옹녀에게는 그런 호사가 주어지지 않는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옹녀의 모든 결정이 변강쇠에 대한 애정 때문인 건 사실이지만, 변강쇠가 죽은 뒤 옹녀가 장승들을 상대로 벌이는 한판 복수극은 장렬하다. 2019 버전에서 비록 옹녀가 그 복수극을 바바리를 입고 하는 게 흠이긴 하지만 옹녀는 확실히 특별하다. 단지 색만 밝히는 여인이 아니라 변강쇠를 통해 사랑을 알고 관계에 눈 뜨고 가정을 이루어 한 아이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정적인 여성으로 변해가는 옹녀는 어쨌든 자신의 목표인 ‘남들처럼’ 사는 삶에는 접근해 간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but...
옹녀는 차근차근 발전해 나간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계를 꾸릴 뿐만 아니라 그 좋아하는 섹스를 참으며 남편인 변강쇠를 일터로 내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변강쇠는 나무를 해오는 일마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옥문을 닫겠다는 옹녀의 무시무시한 협박을 떠올려 장승을 뽑아온다. 옹녀는 장승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저주를 되돌릴 방법도 알려주지만 고집스러운 변강쇠는 그대로 장승을 패서 불을 때서 자신의 목숨도 아궁이에 때 버린다. 옹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남편을 되찾아 오기 위해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활극을 벌인다.
결정적으로 옹녀는 남편 곁에서 장승이 되어 살기로 했던 마음을 단박에 돌린다. 욕망도 재미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다. 생긋 웃으며 바로 돌아보며 ‘그럼 나 안할라요!’ 하고 자르는 옹녀처럼 사랑스럽고 재미난 인물이 있을까? 옹녀가 단지 뱃속의 아이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언제나 주인공이었던 옹녀
비록 파란 바바리에 놀라긴 했어도 점을 찍고 돌아온 옹녀는 즐거운 창극이다. 옹녀의 어미는 마지막으로 등장했을 때 ‘시벌노무 거, 나처럼 살지 말어!’를 내지른다. 그 전까지 이게 다 내탓이라고 한탄하던 어미지만 자식 팔자 앞에선 어미도 용기가 솟아난다. 어미는 옹녀에게 장승과 말이 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지극히 서양적이게도 그것은 하늘에 가운데 손가락을 찔러대는 것일지언정 모녀는 힘을 합친다. 도망갈 궁리만 가르쳐주던 어미지만 꿈속에서라도 변한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주인공이 옹녀가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변강쇠>전의 진짜 주인공의 이야기다. 옹녀의 성기를 뜻하는 <가루지기전>으로 불리든, <변강쇠전>으로 불리든, 옹녀는 한 번도 이 작품의 제목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점을 찍지 않고 돌아와도 주인공은 옹녀다. 어떤 점을 찍었든, 옹녀는 제 자리를 찾아서 먼 길을 왔고 많은 관객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서 그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2019년에 한 발 후퇴할 필요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