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열네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나팔, 혜란, 이은숙

알다뮤지컬여성 주인공

2019년 열네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나팔, 혜란, 이은숙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초연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공연 2019년 2월27일~4월21일, BBCH홀
대본 이희준
작곡 박정아
연출 김동연

 

TV에서 본 만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셋이 합쳐 아이큐 백!”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의 여성 캐릭터들이 딱 그러하다. 각자가 여성 캐릭터에게서 잘 발견되지 않는 미덕을 딱 하나씩만 보유하고 있다. 두 명의 남성 캐릭터가 착실히 과거를 딛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갈등을 겪고, 우정을 쌓아가며, 각자의 희생을 만천하에 알릴 때, 여성 캐릭터들은 깃발을 흔들다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육군에서 제작한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이만큼이나 선전하는 작품을 본 것은 처음이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각성의 도구로 이용당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남자 주인공처럼 서사의 주인공은 되지 못한다. 결국 이들의 이야기는 여군에서 만들지 않는 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군인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가 군인들을 위한 위로상품이 아니게 된 것은 분명한 성장의 조짐이기는 하다.

* 이하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의 내용 누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거리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자 안동 유생인 동규의 아버지는 상소와 함께 자결을 하고, 이상용과 이회룡 등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가진 전답을 다 처분해 간도로 떠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이상용의 노비였던 팔도와 아버지를 잃은 동규도 합류한다. 홍범도 장군 밑에서 나팔수로 인정받았던 나팔과, 마적에게 부모를 잃고 마적단에서 키워진 혜란도 학교에 합류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매일을 사는 것 같았던 팔도는 그곳에서 동규와 친구가 되고 나팔, 혜란 등과 우정의 각서를 쓰면서 인생 처음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3.1 만세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의 소문이 퍼지며 수많은 조선 학생들이 합류하게 되고, 신흥무관학교는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지청천도 합류한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교관과 선생들이 출타한 바로 그 시기에 학교가 마적으로부터 습격을 당하고 학생들을 인질로 잡아가 몸값을 요구한다. 마적의 스파이로 오해 받는 혜란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적극적으로 마적을 습격해 동료들을 구해올 것을 제안하지만, 동료를 구한 뒤 혜란은 나팔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나팔이 여자라는 사실을 끝내 숨겨준 채로. 

팔도는 친구인 동규가 매일 친구에게 쓰던 편지가 사실은 밀고장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곳을 떠나려는 동규를 다그치지만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보낸다. 팔도는 거사를 치르다 자살하고 만다. 동규 역시 이완용의 개처럼 살던 인생을 청산하고 그를 향해 총을 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누구 한 명이라도 살아남으면 죽은 친구를 대신해 복수하자던 젊음들은 그렇게 모두 세상을 떠난다.

우선 이 작품은 벡델 테스트를 무난하게 통과한다.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여성 캐릭터인 나팔과 혜란은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대사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팔이 남자인 줄 알았던 혜란의 짝사랑이 절절하게 그려질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여성 인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주체적이고 자신의 꿈을 위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청춘들이라고 박수 쳐줄 수 있을까? 그것을 판단하려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주요 남자 인물들과 비교하는 수밖에 없다. 미리 말하자면 결과는 공평하지 않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but...

인간은 한 번은 죽는다. 하지만 이 작품의 네 주요 등장인물인 나팔, 혜란, 팔도, 동규는 지나치게 일찍 생을 마감한다. 지병도 사고도 아니다. 자의도 타의도 아니다. 그들에게 준 것 없는 ‘나라’를 위해,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새겨졌는지도 알 수 없었던 애국심이 그들을 사지로 내몬다. 이 작품에서 이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나라를 위해 일찌감치 생을 버리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캐릭터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을 운명으로 등장한다. 그나마 죽음의 장면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격대로, 그들이 원했던 그대로 죽어가는 것이 위안이다. 

주어진 운명이 죽음일 때, 캐릭터들이 각자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과연 그들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을까? 명령을 목숨처럼 여기는 군대답게, 육군 뮤지컬인 <신흥무관학교>는 장렬한 최후를 통해 감동을 주려 한다. 그 목적성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장 안타깝게 말려 들어간 스무살 남짓 청춘들의 죽음은 한탄과 눈물을 자아낸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성 인물은 거국적인 목표를 품는다. 개인의 영달과 꿈은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큰 목표다. 나라의 독립. 그 목표를 위해 이회영의 스무살도 더 어린 아내 이은숙은 남편과의 작별도 의연하게 고수하고, 남편이 임정에 합류하기 위해 떠난 뒤에 신흥무관학교를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선다. 거기에 대고 '여자의 몸으로' 운운하는 이회영은 우유부단하게 그려진다. 이은숙은 그런 남편을 꾸짖으면서도 애정으로 감싸는 대장부의 면모를 보인다. 일종의 개그코드로 사용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묘비에 그저 ‘이회영의 처’로 기록될 걸 알면서도, 이름을 주지 않는 나라를 지키고자 고생을 받아들이고 품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은숙은 서사를 보여주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보다 실존인물을 통해 그 당시 여성이라고 독립운동을 못할 게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단 두 번의 등장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이 남자 육군인 팔도와 동규다 보니, 여성인물들인 나팔과 혜란은 입체적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주변 인물들로서 주인공과 짝을 맞춰 함께 죽어가는 하나의 예시 인물로서만 존재한다. 나팔의 목표는 홍범도 부대의 나팔수가 되는 것이다. 나팔수가 되어 독립운동의 전쟁터에서 제 몫을 해내고 싶다. 혜란은 마적에게 죽은 부모의 복수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가 나팔에게 반해 눌러앉는다. 

이들에게 나라는 사실은 무엇도 주지 않았다. 나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풍족하게 받았던 동규는 배신자가 되어 이들을 사지로 몬다. 고아로 태어나 이회영에게 거두어져 노비로 살다가 신흥무관학교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팔도는 안동에서였다면 동규와 함께 말도 섞지 못할 낮은 신분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신분 격차도 없기 때문에 팔도는 유식한 양반가의 아들과 친구가 된다. 팔도가 인생 최초의 친구를 얻어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워 한껏 달아오르는 만큼, 배신자 동규의 고뇌 역시 깊어진다. 

한편 혜란과 나팔의 갈등은 단순하다. 그저 혜란의 짝사랑을 모른 척하는 나팔의 고지식함 뿐이다. 여성 인물들인 나팔과 혜란에게 주어지는 것은 '여자인 줄 알았어도 여전히 사랑한다'는 혜란의 순정 스토리 뿐이다. 큰 고민은 남자가 하고 귀여운 고민은 여자가 하는 도식에서 이 작품은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조연과 주연의 차이가 아니다. 남장을 하든 안 하든, 여성의 역할은 이 작품 안에서 여전히 기존의 ‘여성스러움’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but...

이은숙의 경우는 에피소드로 지나가는 캐릭터라 치자. 나팔과 혜란을 보면, 이들은 주어진 플롯을 따라 결말을 향해가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혜란이 마적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적의 손에 죽는 것 뿐이고, 나팔수가 되는 게 꿈인 나팔의 결말은 나팔을 불다 죽는 것이다. 이들의 운명은 사실 처음 등장에서부터 정해져 있다. 그만큼 단순하게 만들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에게는 무너질 성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하는 차원에서 동규와 팔도를 보자. 동규는 극 중 가장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그의 내면에는 이미 일본군과의 독립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상태다. 일본군에게 항복하려는 마음과, 나팔처럼 해맑게 자신을 투신하는 모습을 부러워 하는 마음이 그를 괴롭힌다. 결국 그는 일본 정부 요인에게 총을 겨누면서 팔도의 친구로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다. 

팔도는 동규의 배신을 우연히 알게 된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극의 구할을 바보같은 캐릭터로 나온다. 팔도의 조증 환자같은 모습에 스승인 이회영은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른다. 하지만 팔도는 극의 마지막 십분 동안 친구의 배신으로 인생을 한꺼번에 깨닫고 ‘멋진 남자’로 돌변하여, 그를 가르쳤던 전임 교관이 그랬듯이 총 한 자루를 품고 요인 암살에 나서 수세에 몰리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이 둘이 우정과 갈등과 배신과 화해를 겪는 동안 혜란과 나팔은 무엇을 하나? 아무리 조연이라지만 등장 빈도에 비해 스쳐 지나가는 이은숙과 다를 바 없이 단순하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홍범도 군대의 나팔수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홍범도를 짝사랑한 게 아니라면, 나팔의 결정은 연애에 구애받지 않은 그 자신만의 결정이다. 그는 천애고아처럼 보인다. 혜란 역시 천애고아다. 그리고 마적단에 납치된 동기들을 구해오겠다고 결심할 때의 혜란의 결정은 결코 연애감정 때문이 아니다. 물론 사랑하는 나팔에게 미움을 사기는 싫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혜란은 이미 자신의 종말을 예감한다. 

이 작품 안의 어느 여성 캐릭터도 연애에 이끌려 남자의 결정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누군가를 한결같이 동경하는 캐릭터들로 남는다. 동규가 죽은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를 원하고 나팔이 이회영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과 달리 나팔은 소녀처럼 홍범도를 동경하고, 혜란은 그런 나팔을 동경하고, 이은숙은 남편의 뜻을 거침없이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강인함을 표현한다. 어찌 한결같이 여성 캐릭터들은 누군가를 동경해야만 한단 말인가.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나팔과 혜란 중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은 혜란이다. 혜란은 나팔과의 우정을 다짐하는 각서를 쓰면서, 나팔의 이름을 보고 여성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혜란은 그런 나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거두지 않는다. 나팔이 자신을 속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놀렸다고 생각하기보다, 남장을 해야만 했던 나팔의 사연을 앞서 짐작해 주고, 나팔의 비밀을 지켜준다. 

이 일을 통해 혜란은 한 발짝 ‘인류애’를 향해 나아간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여성들의 고난이 나팔에 대한 유대감을 더욱 깊게 해줬을 터다. 나팔의 경우, 무술 실력과 나팔 실력이 늘어난 것 외에 이렇다할 발전은 없다. 무작정 홍범도의 군대에 합류하겠다는 최초의 목표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학교에서 다른 동기들을 가르칠 정도가 되지만, 캐릭터 자체의 성장 과정은 이 작품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두 번째 등장했을 때 이미 성장해 있고, 그 상태로 죽음을 향해 간다.

종합 별점 ★★★★

여성 캐릭터도 독립하길 꿈꾸며

독립군을 다룬 작품인만큼 이 작품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픽션과 논픽션이 섞인 작품에서 실존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이 섞였을 때, 허구의 인물을 죽이는 것은 정공법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 중에 만족할만큼 자신의 서사와 변화와 발전을 이루는 사람은 없다. 한 마디로 셋이 합쳐 한 명의 인물을 만들듯이, 의지는 이은숙, 행동은 나팔, 애달픈 전사는 혜란 등으로 한 인물이 응당 가져야 할 특징들을 셋이 나눠서 간신히 한 명을 만들어내는 형국이다. 여성 인물이 프랑켄슈타인도 아닐진데, 무대 위에서 온전한 인물로 걷기가 이토록 어려울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1막을 지나 주인공들의 갈등이 고조되고 신파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 하나 하나의 젊은 죽음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역시 이 작품이 주는 일종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나마 여성 인물들이 헐벗고 등장해 특정 성을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하는 자조 섞인 결론에 이른다. 시작이니까, 변화는 이제 시작이니까, 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본다. 여성 인물들이 서로의 희생을 갈아넣어 죽음에 이를 때, 홀로 당당히 서서 총을 겨누는 남자 주인공들을 보며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는 날이 대한독립처럼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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