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Passion>
뮤지컬 <Passion>은 스티븐 손드하임의 작품 중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다. 스티븐 손드하임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신처럼 추앙받는 뮤지컬계의 전설이다. 그 전설은 흥행 때문이 아니라 뮤지컬계를 한 발 앞서 이끌고 가는 혁신성 때문이다. 뮤지컬계의 흥행을 상징하는 작곡가가 <오페라의 유령>의 앤드류 로이드-웨버라면 스티븐 손드하임은 늘 뮤지컬의 미래를 상징하는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다. 하지만 흥행과 큰 인연이 없다보니 한국에서의 공연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Company>, <Sweeney Todd>, <Assassins> 등 단 세 작품만 공연됐다. 학교 공연으로 인기를 끄는 <Into the Woods>도 끝끝내 상업공연은 무산됐다.
스티븐 손드하임의 작품 속의 여성 인물들은 대부분 작품 속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인물들이다. 진취성을 지니고 앞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체계를 전복시키거나 결말에 이르는 것은 대분은 남성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 <Passion> 속의 포스카는 조금 다르다. 다른 어떤 작품 속의 여성 인물들보다 강렬하고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다가간다. 목숨을 갈아내서라도, 아니, 얼마 안남은 목숨 때문에 더더욱.
줄거리
때는 1863년의 이탈리아. 잘 생기고 매너 좋은 장교 조르지오, 일명 조조는 밀라노에서 시골로 발령받는다. 그의 연인은 아름다운 유부녀인 클라라. 작품은 침대 위에서 뒹구는 두 사람이 먼 곳으로 헤어지게 되면서 편지를 주고 받기로 약속하는 장면으로 열린다. 이후 두 사람이 주고 받는 편지는 조조가 시골에서 만나게 된 포스카에 의해 미묘하게 변해간다.
포스카는 16살에 부모의 재산만 노렸던 사기꾼과의 사기 결혼으로 모욕을 당한 후,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사촌인 대령이 후견인으로 나서서 보호 중이다. 대령은 애당초 포스카의 재산만 노렸고 누구도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며 모욕을 주었던 루도빅을 소개한 것이 자신이었기에 책임감을 갖고 있다. 상급장교들이 식사를 하는 대령의 처소 식당에서 조조는 며칠 동안이나 포스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는다.
포스카는 처음부터 이미 조조와 사랑에 빠진 듯했다. 그의 잘생긴 모습만이 아니라 생의 활력이 넘치는 모습에 질투와 사랑을 동시에 품는다. 마치 불시에 달려온 마차에 치인 듯, 포스카의 깊은 불행과 우울이 조조의 밝은 면을 집어삼킬 듯 원하게 된다. 포스카는 교묘하게 조조와의 만남을 우연에서 운명으로 만들어가고, 자신의 병과 아버지의 지위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해 조조와 둘만의 시간을 만들며 조조의 사랑을 갈구한다.
조조는 포스카에게 처음에는 연민을, 그 다음에는 혐오를 느끼다가, 마지막에는 포스카에게 압도 당하고 결국은 사랑하게 된다. 포스카의 마음을 막기 위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클라라의 존재에 대해 고백하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뿐. 2막에 이르면 클라라가 반대로 포스카를 질투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만 포스카는 자신이 클라라의 대신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포스카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 위해 클라라와의 관계를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조조는 클라라에게 남편을 떠나라고 호소하지만 클라라는 아이들이 클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을 위한 완전한 사랑은 포스카 뿐이라고 생각한 조조는 결국 포스카의 절대적인 사랑에 압도 당한다. 포스카의 의사와 후견인인 대령은 포스카의 건강을 위해 조조를 떼어놓기 위해 포스카에게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 조조 역시 스스로의 발로 포스카의 방에 들어가 포스카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 하룻밤이 포스카를 죽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는다. 포스카를 농락했다며 결투를 신청한 대령과의 결투 이후 몇 달 동안이나 고열에 시달리며 생사를 오간 후 살아난 조조는 포스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죽어도 죽지 않는 열정
포스카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충격적일 정도로 인상적이다. 조조는 사랑하는 클라라에게서 받은 편지를 읽고 있다. ‘이곳은 지옥같아. 당신이 그리워. 날 잊지 마.’ 하고 하소연한다. 무대 위의 클라라는 시간이 금방 흘러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을 거라고 다정하게 위로하며 조조의 곁을 맴돌며 환한 조명을 받는다. 이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명 뒤 어둠 속에서 포스카가 등장한다. 상복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천천히. 그리고 말을 거는 순간 클라라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포스카가 서 있다. 마치 조조의 마음 속의 자리의 주인이 언젠가는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Marin Mazzie(클라라), Donna Murphy(포스카), Jere Shea(조조). 클라라와 조조가 밀회를 나누고 휴가를 나간 조조를 그리워 하는 포스카의 모습이 겹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1994년 토니상 쇼케이스.
처음 만남에서 포스카는 자신의 병을 어필한다. 조조가 말하는 멋진 세상을 자신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며 연민을 산다. 하지만 그것도 조그맣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아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스스로 싫어하면서도, 그것조차 무기가 될 수 있다면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포스카다.
이 작품의 원작은 <포스카>라는 1869년에 쓰여진 이탈리아 소설이다. 스티븐 손드하임은 이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1981년의 영화를 보고 뮤지컬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쓴 많은 뮤지컬들 가운데 그가 먼저 나서서 뮤지컬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작품은 그닥 많지 않다. 연출가이자 무대 미술가, 대본 작가인 라파인이 이미 제안했던 작품을 결국 취소하고 이 작품을 완성해 무대에 올리는 뚝심을 발휘했다.
그의 코멘터리에 따르면 그는 이 작품은 포스카가 조조를 사랑하는 영화가 아니라 조조가 포스카를 사랑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손드하임은 그 납득할 수 없는 과정을 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작품을 다 보고 나면 내가 무엇을 보았나 싶을 정도로 이 안의 관계들은 모두 일그러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의 인물들에게 소름 끼칠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러설 곳 없는 사랑, 또는 집착
포스카의 병명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 마음의 병으로 사람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포스카는 이미 어린 나이에 심한 배신으로부터 깊은 병을 얻었다. 의사는 신경증이 포스카의 건강을 갉아먹는다고 하는데, 그 자체가 사실은 포스카의 인생에 대한 열정의 반증이기도 하다.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좌절이 병으로 표출되고, 마침내 원하는 목표가 눈 앞에 나타났을 때는 육체가 너무 쇠약해졌다.
포스카가 극중에서 처음 위독해진 때는 조조가 5일 동안 휴가를 갔을 때다. 조조에게 애인이 있음을 직감한 포스카는 조조에게 가지 말라고 매달리다가 결국 편지를 보내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의 편지만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커튼을 내린 방 안에서 책에만 매달렸던 포스카는 책에 쓰여진 시와 같은 열정적인 편지를 기대하지만, 정작 온 편지는 조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조조는 포스카의 교묘한 추궁에 빠진다. 도망갈 길은 없다. 포스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 만큼 조조가 그녀로부터 사랑받고 있는지를 거듭 거듭 다른 방식으로 돌려서 공격하듯 물어본다. 그 둘의 대화는 마치 펜싱같은데, 이 싸움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조조의 애인은 남편이 있는 여성이고 포스카는 이 싸움에서 물러설 데가 없기에. 포스카는 이 대화를 통해 조조의 애인이 유부녀라는 사실까지 밝혀내고 자신에게 기회가 있음을 깨닫는다.
포스카가 무서운 것은,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스카에게 연민보다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포스카는 조조의 사랑 외에 아무 것도 더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랑은 완전하고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하다못해 조조가 속절없는 바람둥이었다면 오히려 포스카는 그렇게 조조와의 사랑에 매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조는 ‘좋은 사람’이었다. 포스카의 비명에 질려 아무도 다가가지 않을 때 포스카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순진하게도 포스카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포스카를 소일거리로 생각했던 가벼움의 댓가를 조조는 처절하게 치른다. 그는 진짜로 포스카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조조가 포스카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장면 ‘No One Has Ever Loved Me’
무대의 지배자
포스카는 자신의 인생에 남은 모든 기운을 조조의 완전한 사랑을 얻는데 쓴다. 조조가 포스카의 생명을 걱정하며 섹스를 거부할 때 포스카는 그 걱정 자체에 만족감을 얻는다. 그녀는 다른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모든 걸 해보고 싶어한다. 결국 포스카는 누구도 해보지 못한 연애를 하고 세상을 떠난다.
포스카는 등장하지 않을 때도, 등장했을 때도, 걸어다닐 때도,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무대 전체를 지배한다. 이토록 강렬하게 전체를 지배하는 여성 캐릭터가 뮤지컬에 존재했던 적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더더욱. 포스카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죽음이라는 사실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위해 그것을 던져버릴 때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포스카가 원했던 것은 조조의 사랑 그 자체보다 조조의 빛나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포스카는 그것을 훔쳤다. 조조는 포스카를 알고 난 이후 다시는 이전의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주변에 있다면 절대로 피해가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지만, 무대 위에서 포스카는 등장할 때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모든 인물들을 자신의 바람대로 끌고 간다. 그 방향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죽음이 포스카를 기다리고 있음을 등장인물은 물론 모든 관객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난해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을 한국 무대 위에서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여성 캐릭터는 단 두 명만 등장하지만, 그 두 명이 빛과 어둠처럼 무대 전체를 끌고 간다. 게다가 그 중 제일이 어둠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매력적이다. 사랑은 결코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남은 시간을 모조리 사랑에 쏟아 붓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포스카는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