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언박싱 3. 우리는 곽정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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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언박싱 3. 우리는 곽정은이 필요하다

이자연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지루하디 지루한 연애

시작은 칠포였다.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빠듯해서 연애나 결혼을 포함한 일곱 가지 사항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포기한다기 보다는, 포기 ‘된다’고 표현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부상 이후, 많은 여성들이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타의에 의한 포기가 아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려는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연애와 결혼에 회의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연애에 관한 프로그램도 딱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성 앞에서 자연스럽게 성적 어필을 하는 법이라던가, 유연하게 내 민낯을 가리는 법, 남녀의 본심을 해석하는 법 등 일명 연애학 개론이 영 지루하기만 했다. 주 시청층인 2030 세대가 이제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방송 관계자들은 잘 모르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많은 반문이 그 빈틈을 메울 뿐이다. 우리가 반드시 연애를 해야만 하는 걸까? 연애로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그보다 잠재적 연애 가능 상대가 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KBS JOY에서 방영하는 <연애의 참견 시즌2>는 2018년 여름부터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으며 이어져 왔다. 참여자의 사연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패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프로그램 기본 골자다. 채택된 이야기가 워낙 독특하고 자극적인 면도 있어서 캡쳐본으로 많은 이들에게 널리 퍼지기도 했다. 또 연애 이야기야, 하며 못마땅해할 찰나에 그녀가 등장했다. 바로 곽정은이다.

중심축 점검하기

곽정은의 말과 이야기가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JTBC <마녀사냥>에서부터였다. <마녀사냥>과 <연애의 참견>이 연애사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어서 비슷한 결의 프로그램처럼 비춰질 수 있지만 그 방향성은 꽤 다르다. <마녀사냥>이 연애를 남성중심적인 엔터테인먼트의 일환으로 해석했다면, <연애의 참견>은 그보다는 카운셀링이 더 중심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카테고리를 두고 있어도, 각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의 마음가짐은 달라진다. 이를 테면 <마녀사냥>은 여느 남자들의 술자리와 그들의 섹슈얼한 유머, 그 자리에서 휘발되는 조언이 겹쳐 보이고, <연애의 참견>은 따뜻한 카페에서의 대화나 친한 언니와의 긴 새벽 통화 같은 게 떠오른다. 그리고 이 차이는 곽정은이 메인 패널로 있느냐 없느냐가 가른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가 하나의 사연을 접근하는 방식은 이렇다. 천천히 깊게 듣고, 사연을 보낸 사람의 상황에서 한번 생각하고,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 또 한번 생각한다. 단순히 청취로만 그치지 않고, 아주 예리하고 정확한 눈으로 치명적인 조언을 전한다. 내용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의 말은 매우 치명적이다. 무엇보다 곽정은은 사연을 보낸 사람의 성별을 강조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연애 역할을 멋대로 재단하지 않으며, 연애가 이래야만 한다는 강요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사연을 보낸 사람에게 자꾸만 그 자신을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녀가 자주 하는 말은 이런 것들이다. “다시 돌이켜 봐라”,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라”, “강한 결단을 내려야 하고,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것 같다”. 반복되는 말을 듣다 보면 그가 이끌어 내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연애로부터 내가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의 행복을.

내 마음을 인정해 주세요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언가 나를 힘들게 하는데 이걸 계속 이어나갈지 고민이 들 때에는 가족을 한번 떠올려 보라고. 나를 오랜 시간 사랑하느냐, 아낌없이 보호하느냐 애썼던 부모를 생각하다 보면, “그래, 내가 이렇게 존귀한 사람이었지. 그런데 굳이 고통을 자처할 필요가 있나?” 하면서 강한 결단력을 갖게 된다고. 그게 필연 부모가 아닐지라도, 타인이 아닌 자신을 존중하고 마음을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곽정은이 필요한 이유다.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연애 중 자기 중심을 잃어왔는지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많은 사정과 사연이 쏟아진다는 네이트 판과 온라인 커뮤니티 고민 게시판만 보아도 ‘내가 지금 화가 나는 게 맞는지 좀 봐달라’며 시작하는 글들이 수두룩 빽빽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 조차 타인의 공감과 인정이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여성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은, 결국 자기 중심을 잃어버린 여성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관계에 있어서 상호적인 흐름을 읽는 것은 중요하다.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 제스처와 기운으로 문제를 진단하는 능력은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인 요구사항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 ‘나’가 빠져버린다면, 그건 ‘우리’라는 관계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들여다 보도록 유도하는 것. 그것이 곽정은이 대중에게 유일하게 참견하는 항목이지 않을까.

그녀의 말

종종 온라인 상에서 후회되는 과거 연애사 배틀이 진행되곤 한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일들이 금세 쏟아진다. 옛날 이야기 조금 나누는 것 뿐인데, 분노, 수치심, 후회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이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사랑은 원래 부딪히고 아파하면서 깨닫는 거야, 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갇혀 지냈나. 그게 정말 사랑이라면 우리는 좀 몰라도 된다.

그가 언제나 따뜻한 말을 전하는 건 아니다. 냉소적이고 차가운 목소리로 사연의 주인공과 그 상황을 다그칠 때도 있고, 화가 날 땐 손사레를 치며 영상 시청을 거부할 때도 있다. 단언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면서도, “헤어지기 딱 좋은 때네.”라며 주저 않고 말하기도 한다. 반대로 사연을 다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조언을 하던 중 목이 메어 말을 다 잇지 못할 때도 있다. 혹자는 그녀더러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만큼 이입이 출중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진중한 공감이 있기에 그녀의 냉소도, 눈물도, 조언도 개연성과 신뢰를 얻는다.

그간 물리적, 언어적 영역을 넘어서 정서적 학대까지 가 닿는 데이트 폭력이 여성들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여전히 그 순환과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딱 한 발자국 어치의 용기가 필요한 그들에게 곽정은의 말을 빌려 전한다.

그 사람과 나를 동기화 시키면 나를 밀고 들어가서 내가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 사람에게 화를 내야 할 때에도 결국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라 화도 못 내고요. 하지만 이 고리는 내 손으로 어떻게든 끊어야 해요. 그러면 그 이후에 또 다른 가능성과 길이 열려요. 왜냐, 내가 스스로 끊어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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