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언박싱 7. <하이킥>에서 나문희를 다시 보다

알다드라마

TV 언박싱 7. <하이킥>에서 나문희를 다시 보다

이자연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최근 하이킥 시리즈를 다시 보게 됐다. 하이킥 시리즈는 2006년 <거침없이 하이킥>을 시작으로 2009년의 <지붕 뚫고 하이킥>, 2011년의 <짧은 다리의 역습>이 이어졌다. 매 시즌 두터운 마니아 층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김병욱 PD의 대표 작품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어언 13여년 전의 프로그램을 다시 보니, 새삼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다.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하이킥 시리즈 안에서, 과연 우리가 놓치고 만 것은 무얼까. <거침없이 하이킥>의 ‘문희(나문희 역)’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일러스트 이민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거침없이 하이킥> 속 문희의 명장면이 회자되어 다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일명 ‘호박고구마’ 씬. 밥을 먹다가 호박고구마를 ‘고구마호박’, ‘호구마’ 등으로 잘못 말한 문희가 며느리 해미로부터 지적을 받자 분노에 받쳐 호박고구마를 소리 높여 외쳤다. 어렵게 단어를 부르짖는 것도, 먹던 숟가락을 밥상에 내던지는 것도, 가족들 앞에서 울먹이는 것도 모두 우스꽝스러웠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그리는 문희의 모습은 보통 이런 방식이었다. 식탐이 많아 음식을 입에 욱여 먹거나, 세상 돌아가는 법을 몰라 황혼이혼이 이혼의 한 종류인 줄 알고, 각종 미신을 맹신하면서 지냈으니 말이다. 다른 등장 인물들이 그의 생활 방식과 태도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은연 중 문희를 무시했다.

물론 시트콤이라는 장르 특유의 등장 인물을 희화화하는 요소가 있을 수는 있다. 순재도 진료를 할 때마다 문제가 생겨 환자가 끊긴 지 오래고, 준하는 게으르고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똑 부러진 해미조차 이상한 주사를 갖고 있었으며, 민용도 게임에 중독돼 일상을 유지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모든 인물이 공평하게 인간적인 모순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종 집안일에 내몰린 문희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각자의 사회적 지위를 성취했고, 약점을 상쇄시킬 강한 능력도 내비쳤다.

순재는 의료업으로 이미 건물 한 채와 주식 재산을 가질 정도의 부를 쌓았고, 준하도 주식투자로 인생 역전을 해냈다. 해미야 말할 것도 없이 각종 세미나와 포럼에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주요 인물이었다. 민용? 민용은 간첩 스파이와 국정원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 인물이었다는 걸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일반 고등학교 체육교사로서 얻을 수 없는 명예와 경험을 얻은 유일한 인물이다.

처음으로 돌아가기

처음에는 문희의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인물 리스트에도 문희는 없었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방영하던 당시, 인기가 가장 많았던 인물은 민용, 해미, 윤호였다. 각자의 소신이 뚜렷하고 서사를 의지대로 풀어나가는 인물들이다. 아무래도 오로지 육아와 살림을 맡은, 식탐만 많고 힘만 센 문희가 멋진 사람으로 보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에피소드를 반복해서 보다 보니, 아뿔싸. 문희에 대해 내가 놓친 게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어느 날엔가 문희는 준하의 방귀 냄새가 예전과 달리 독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방귀 뀌는 준하를 모두가 나무랄 때 유일하게 문희만이 냄새로 건강 걱정을 한 것이다. 그 뒤로 문희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방구보감’. 준하에게 녹즙과 채소를 먹이고, 독소를 배출하기 위해 반신욕을 시켰다. 때에 따라 방귀 냄새를 확인하면서 식사량을 줄이거나 운동을 시키기도 했다. 뚜렷한 독립변수와 통제변수를 두면서 자기만의 실험을 이어나가는 창의적인 관찰력이 돋보였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매력이었던 비상봉의 이야기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민용이 순재 몰래 옥상 단칸방에서 지내는 동안, 그가 쉽게 오다닐 수 있도록 비상봉을 만든 게 바로 문희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부터, 설계, 그리고 제작까지 그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상황 판단력과 실행력, 임기응변까지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게다가 문희는 언어 습득력도 빨랐다. 미국에 사는 친척 아무개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영어 회화 학원을 등록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가 구현할 수 있는 문장은 길지 않았지만 배움의 적극성이 매우 높아서, 그의 말마따나 ‘가방 끈이 긴’ 한의사 순재보다 훨씬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차곡차곡 쌓으며 자신의 커리어를 높여가는 해미를 보면서 문희가 말한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공부하는 거 꿈꿀 수도 없었는데. 나도 학교 다니고 공부 좀 했으면 지금쯤 달랐을까?” 그러게. 문희가 교육의 혜택을 조금 더 누릴 수 있었다면 지금의 문희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의 창의력, 관찰력, 섬세함, 적극성, 판단력, 실행력을 기반으로 어떤 문희가 가족들을 맞이했을까? 아니지. 가족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

어느 평범한 상상

문희는 새롭게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요가도 배우고 문화 센터에서 제빵도 배웠다. 노래도 곧잘 했고,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따뜻한 마음과 뛰어난 공감으로 가족들을 사랑했는데, 그런 문희만이 아무런 성취나 역할 변화 없이 시트콤 마지막 회를 맞이했다. 주부로 시작해서 주부로 끝난, 유일한 사람이다. 주부의 역할을 지우라는 게 아니고, 집안일을 하는 사람을 시트콤에서 등장시키지 말란 의미는 아닌데 여전히 찜찜하다. ‘정체’가 그의 몫인 게.

오늘의 문희를 상상해 본다. 그는 아마 생물연구에 힘을 쓰는 연구원일지도 모른다. 생물종 다양성을 궁리하고, 독일의 어느 생물정보학 연구소와 협약을 맺어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더 나가보자면 ‘영향력 있는 타임100인’에 드는 연구소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 터무니 없어 보이는 상상은 우리에게 자꾸만 아쉬움을 준다. 문희를 그려낸 방식이 아깝고, 문희와 비슷한 현실 속 사람들에게 그렇다. 과연 우리가 시트콤 안에서만 문희를 놓친 걸까.

이자연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TV 언박싱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드라마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