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언박싱 2. 이영지가 이영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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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언박싱 2. 이영지가 이영지했다

이자연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언프리티고 프리티고

TV 속이 알탕 천지라는 말에 억울함을 표현하는 남성들을 종종 마주치곤 한다. 뛰어난 사람이 그 뿐이라서 그런 걸 어떡하냐, 누구누구도 나오는데 무슨 여자가 안 나오냐, 그리고 최근엔 이영자가 대상을 받았잖냐, 까지. 하지만 이 ‘알탕’이라는 말은 단순히 양적인 면을 넘어서 질적인 면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를 테면 부엌을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기던 풍토는 셰프의 등장과 동시에 온데간데 사라지고, 오직 요리하는 남성의 모습만을 조명했다. 그뿐인가. 낙태죄 폐지 위헌 여부를 발표하던 날에는 YTN에서 남자 셋이 두런두런 모여 낙태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방송하기도 했다. 어쩐지 여성이 주체인 이야기에 전문성을 덧칠하면 남성의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위화감은 힙합에서도 빗겨나가지 않는다. Mnet의 <언프리티 랩스타>는 래퍼 참여자를 제외한 사회자, 심사원 모두 남자였다. 여성 래퍼들을 한 데 모아 그들만의 열띤 리그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어째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남자였을까. 게다가 웬 언프리티. <쇼미더머니>는 당찬 명령문인데, <언프리티 랩스타>는 제목부터 외모에 관한 수식어를 붙이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쇼미더머니>가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시작과 동시에 남성 래퍼의 범람이고, 손에 꼽힐 정도로 몇 안 되는 여성 래퍼들도 회차가 지날수록 줄어들다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남성 래퍼가 1위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지루하고 평범한 결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버닝썬 사태에 대해 많은 남성들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남자들끼리 있을 땐 보통 다 그렇게 얘기 하지 않나?

그들의 말마따나 남성의 세계가 그렇다면, 힙합씬에서 주옥 같은 여혐 가사가 통용된 이유를 알 법도 하다. 여자들이 산부인과처럼 다리를 벌리고(송민호), ‘타이거 JK’ 마누라 거는 내 ‘미래’에 비하면 아스팔트 위에 껌딱지고(블랙넛), 편식 안 하는 이유는 김태희처럼 '비 위'가 좋고(서출구). 남자의, 남자에 의해,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판 안에서 여성들이 얼굴 조금 내민다고 그게 과연 알탕이 아닌 걸까. 실력이 안 되니까 여자들이 없는 거라고? 이거야 말로 말이 안 된다. 세상 어떤 일이 특정 성별만 잘 할 수 있나. 없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거겠지.

영지의,
영지에 의해,
영지를 위해

Mnet의 <고등래퍼3>는 2019년 2월에 시작해서 지난 4월 12일 8회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시즌3 대망의 우승자는 바로 이영지였다. 그의 등장은 아주 놀라웠다. 낮고 묵직한 톤, 정확한 발음 그리고 큰 성량까지 랩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연습을 한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심사원으로 등장한 남성 래퍼들을 비롯해 많은 학생들이 그녀의 첫 싸이퍼 무대를 보며 충격 반, 환호 반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하지만 여성 래퍼의 좁은 입지는 미성년 래퍼에게도 동일했다. 멀찍이서 보아도 여성 학생은 드물었고, 그런 이영지는 다른 남학생 래퍼 보다 관문이 하나 더 있는 듯했다. 바로 소년 래퍼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첫 대면에서 이영지를 만난 남자 아이들이 말했다. “넥타이를 너무 많이 멘 거 아니야? 힙합 할 때에는 넥타이 풀어 줘야지”, “넌 힙합이 아니네”, “힙합은 네가 이해하긴 살짝 어려워”. 이영지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아이들은 어떻게 이영지가 힙합을 잘 모른다고 확언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라곤 딱 하나, 성별이었다.

물론 이영지는 그런 질문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 어디서 배운 거야? 그런 힙합?”, “난 또 힙합이 아니야?”, “너무 어렵다. 다시 배워야겠다”라며 능청스럽게 응수했다. TV가 가진 순기능 중 하나는 바로 파급력이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들이 TV 앞으로 등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영지가 맨스플레인과 타인의 평가를 대하는 태도가 또 다른 또래 친구들에게, 혹은 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래퍼 스승들이 그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들을 이영지는 스스로 보여주고 있었다. 저 당당한 목소리와 말투로.

그 많던 충성심은
어디로 사라졌나

경연 프로그램의 경우, 우승만큼 우승 후도 중요하다. 다른 래퍼 우승자들이 그랬듯 그녀도 명성과 부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영지가 1위를 하고 난 뒤의 대중들의 반응은 영 찜찜하다. 유튜브에는 우승곡 <GO HIGH>의 이영지 제거 버전이 올라왔고, 전례 없는 투표 방식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프로그램 후기가 몰려 올라왔다. ‘고랩은 2가 레전드지. 3은 이영지도 딱히. 재미 없어서 보다가 하차했음.’

지금까지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경영 프로그램에서 ‘재미없음’을 경연자의 탓을 돌렸던 사례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니까, 슈스케가 재미 없어서 서인국 탓을 하고, 쇼미더머니가 지루해서 비와이 탓을 했느냐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슈퍼스타K>, <쇼미더머니>, <고등래퍼>를 통틀어 나온 첫 여성 우승자다. 우승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갑작스런 투표 의혹을 제기하는 건 그 의도가 투명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힙합 밖에서 보았을 때, 힙합은 매니아층이 아주 두터운 카테고리처럼 느껴졌다.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래퍼들은 언제나 잘 팔렸고, 금과 명품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왜 이영지에 관해서만 유독 그 충성심이 금이 갈까. 특히 여자들이 다리를 벌리고, 계집애들이 나한테 환장하고, 엄마한테 퍼킹한다는 가사엔 재미 없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영지의 나이는 올해 열일곱.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모르는 것 보다 궁금한 게 더 많은 나이에 이 모든 것들을 ‘왕관의 무게’라는 말로 합리화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치졸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이영지의 스승 코드 쿤스트가 비트를 만들었을 때, 그것이 무척 훌륭해서 사람들은 “코쿤이 코쿤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우승에 가장 주된 요인은, 이영지가 이영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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