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후져서 주의가 필요한,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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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후져서 주의가 필요한, 박나래의 <농염주의보>

신한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2010년 말 정도였을 것이다. 넷플릭스가 없던 시절, 잠 안 오는 밤이나 무료한 주말 오후를 순식간에 삭제하는 블로그가 하나 있었다. ‘감자의 친구는 연애를 하지’, 일명 감친연. ‘홀리겠슈’라는 아이디의 여성 운영자가 엄선한 망한 연애담과 망한 소개팅 썰이 업로드 되는 곳이었다. 처음 그 블로그를 발견했을 때 나는 헤테로섹슈얼 연애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공기처럼 은은하게 흐르는 남녀공학 사립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호르몬은 넘치는데 자존감은 좀 부족한 20대 초반 여성이었다. 감친연은 그런 나의 구미에 딱 맞았다. 여자들끼리만 술 마시는 자리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지 않았던 생생하고 솔직한 헤테로 연애담의 끝장을 볼 수 있었다(아주 가끔 남성들의 사연도 올라왔지만 99%는 여성들의 사연이었다). 

남성들의 외모, 옷차림, 태도, 발언에 대해 어디 가서 크게 떠들지 못할 냉정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평가는 물론, 때로는 오르가즘과 성기 크기까지(!) 생생하게 떠들었다. 솔직히 나는 섹스에서 오르가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블로그에서 배웠던 것 같다. ‘그 전에 내가 오르가즘이라고 생각한 건 오르가즘이 아니었다’ ‘긴가민가 하면 오르가즘이 아니다. 한 번 느끼면 모를 수가 없다’ ‘월척을 떠나서 만선이었다, 만선!’ 아무도 해 준 적 없었던 중요한 성교육이었다. 감친연 운영자 홀리겠슈는 단행본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록 재미있던 감친연에 언제부터인가 ‘더치페이’에 지극히 민감한 댓글이 붙기 시작했고, ‘된장녀’ 같은 단어로 싸움이 나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쇠락해가더니 결정적으로 운영자가 바뀌었다. 그 후로는 그 블로그를 잊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개그우먼 박나래의 스탠드업 코미디 <농염주의보>를 보며 감친연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박나래의 코미디 내용이 바로 망한 헤테로 연애담과 망한 헤테로 섹스담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못 한 ‘선비’와의 연애, 막장 드라마 뺨치는 ‘재미교포’와의 연애, 웃고 있지만 괜히 슬퍼지는 ‘원나잇’ 다음날 아침 이야기.

일러스트 이민

기대하는 요소 없어도
부족하진 않아

내가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기대하는 요소는 주로 블랙 코미디, 아이러니, 미러링이다.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에 이런 요소는 거의 없다. 어떤 건 미러링으로 밀고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여성의 순결에 집착하는지 생각하면, ‘선비’와의 경험담은 성반전을 통해 여성의 성 억압을 조롱하는 수준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가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성별 규범의 반대 상황이니까. 혹시 남중 다닐 때 순결 캔디 받아먹고 그러는 건지, 그렇게 살면 누가 열녀문 아니 열남문이라도 세워주는지, 팬티 속에 은장도라도 숨기고 다니시는지. 잠깐만 생각해도 한국적인 놀릴 요소가 참 많다. 하지만 넷플릭스 영상 속에서는 박나래의 망한 연애담(실화!)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이 점은 아쉬웠다.

그렇다고 스탠드업 코미디로서 부족하다고 평가할 정도일까? 스탠드업 코미디의 기본 형식이 자신의 경험 또는 경험처럼 꾸며진 이야기를 통해 웃음을 주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는 이에 충실하다. 때로 그 경험은 스스로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코미디언들은 여성, 퀴어, 이민자 같은 정치적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정신적 질병에 대해 털어놓기도 하고, 마가렛 조처럼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삶을 공유하기도 한다. 마이크 앞에 그들이 던지는 것은 코미디이기 전에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릴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대중과 공유할 것인가?

박나래가 고른 이야기는 ‘이성애자 여성의 성생활’이었다. 박나래는 마이크를 잡고 “남자 너무 좋아!” “원나잇 좋아!” “아침에 하는 거 좋아!” 라고 외친다. 솔직히 전혀 특별하진 않다. 더구나 수위 높은 넷플릭스 콘텐츠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결코 파격일 수 없다. 박나래가 직접 언급한 대로 “무대에서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섹스에 대해 얘기하는 것뿐이니까(여자 연예인이 무대에서 섹스를 하는 걸 라이브로 볼 생각으로 8만8천원밖에 안 냈다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박나래는 지적했다). 하지만 한국 방송사에서 여성 연예인이 할 수 있는 말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파격이다. 그야말로 ‘주의보’가 필요하다.

어떤 주의보? 박나래가 방송을 그만둬야 할 지도 모른다는 주의보. 탁월한 입담과 발랄한 몸놀림으로 여성으로서 성생활을 이야기하는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바로 여성 ‘연예인’으로서 성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부담이다. 박나래는 TV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 박나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PD들이 라이브 현장에 와서 리허설을 보며 “나래가 방송을 그만두나?” 고민했다는 농담은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는다.

걸-래

아직도, 한국에서는, 여성이 섹스에 대해 공공연히 말하면 비난 받는다!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마치 섹스를 하지 않는 척 해야 한다! 섹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여성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 박나래가 무대 위에 적나라하게 네온사인으로 올렸다. ‘걸(크러쉬박나)래’.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전 남자친구와의 섹스는 물론, 원나잇에 대해 얘기하다니! 블랙 코미디나 디스 같은 ‘독한 점’이 전혀 없는 박나래의 코미디지만, 배경이 한국임을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박나래가 설정한 ‘여성이고 연예인인데 섹스에 대해 얘기한다’는 캐릭터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엄청난 취약점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나는 ‘걸래’라고 읽히는 네온사인을 보며 차마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나래가 한국 사회의 그런 부분을 비웃고자 했다면 지지한다. 최소한 한국 사회의 위선은 까발리고 있지 않은지? 이성애 연애를 많이 하면 ‘승리자’라고 취급하면서, 동시에 섹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천상 여자’로 취급하는 한국 사회는 박나래를 감당할 수 없다. 박나래의 코미디에 내 취향을 넘어선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국에서도 더 다양한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다양한 코미디를 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박나래는 어찌 보면 현재 한국 사회가 용납 가능한 수준에서 가장 파격적인 캐릭터다. 왕성하게 성생활을 하는 자유롭고 똑똑하고 활기찬 이성애자 여성.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움이 줄어든다. 박나래가 열어 둔 길에 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이 다양한 자기 얘기를 가지고 뛰어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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