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언박싱 15. <퀸덤>에 없는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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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언박싱 15. <퀸덤>에 없는 두 가지

이자연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

Mnet <퀸덤>은 올 8월 말에 시작한 경연 프로그램으로, 총 6팀의 걸그룹이 출연해 시청자와 현장 방청객의 투표를 받기 위해 경쟁한다. 각 팀이 한 날 한 시에 앨범을 발매한다는 콘셉트로 무대 위에서 각축을 벌이면서 일명 컴백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렇게 AOA, 러블리즈, 마마무, 오마이걸, (여자)아이들, 박봄이 출연해 매 회 하나의 미션을 가지고 새로운 무대를 꾸리고 있다. 그리고 여기, 지금까지 기존 예능 프로그램에서 걸그룹을 소비해왔던 방식과 달리, <퀸덤>에는 두 가지 요소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쟁 부추기기

여느 경연이 그러하듯 <퀸덤>도 공연 무대를 마친 뒤에 순위를 매긴다. 현장 방청객의 투표를 비롯해서 출연 그룹들이 자신의 무대보다 ‘한 수 위’와 ‘한 수 아래’를 꼽아 그 점수를 합산하는 것이다. 초반에 이 과정이 억지로 경쟁구도를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장성규의 경쟁 유도 발언에 이다희가 건넨 말이 모든 걱정을 종식시킨다. “아니, 성규 씨. 옳지 않아요. 분위기를 이렇게 조성하는 건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컴백을 두고 제대로 붙어 보자는 판을 깔았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평화를 지향합니다.”

이다희의 말마따나 걸그룹 멤버들은 승부 이전에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박봄이 듀엣 미션곡 <허수아비>를 부르다 ‘모두 떠나가도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이라는 가사에 울었을 때 모든 출연진은 그의 외로움을 이해했고, 오마이걸 효정이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생활에 복받쳐 할 때 말 없이 안아준 것도 박봄이었다. 어찌 눈물만이 그들의 연결을 증명할까. 공연 도중 누군가 발을 삐끗하면 “괜찮아! 별 일 아니야!” 하고 외치고, 무대를 마치면 항상 멋있었다고 응원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봤고, 우리가 안다고.

첫 경연 순서를 정할 때도 제작진은 억지로 대립 관계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여자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 큐시트를 짜는 규칙은 이러했다. 제한 시간 내에 자신의 팀이 원하는 순서에 이름표를 붙이는데, 시간이 종료된 후 이름표가 떼어져 있는 팀은 페널티 -1000점을 받는 것이다. 당일 (여자)아이들은 해외 스케줄로 불참했기 때문에 페널티를 받을 가능성은 더욱 높았다. 뿐만 아니라 제한 시간 직전에 달려나가 다른 팀의 이름표를 무작위로 떼어내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마감까지 몇 초를 남기고 모두가 이름표를 떼어버릴까 말까 하면서 술렁일 때 오마이걸의 유아가 말한다. "그래, (이름표) 떼지 말자. 우리가 떼였다면 정말 슬펐을 거야." 이어 러블리즈의 미주가 개인 인터뷰에서 당시 속마음을 전한다. "정말 떼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기회일 수 있는 거잖아요. 근데 오마이걸에서 자기였어도 슬펐을 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맞아, 내가 떼였어도 슬펐겠지.' 싶더라고요."

동료애,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공포. 비슷한 처지의 여성 아이돌끼리 이해하는 동료애와 방송의 ‘공공의 적’이 되기 싫은 공포가 동시에 느껴졌다. 이름표를 뗐을 때 또 다른 리얼리티 쇼의 희생양이 될까 망설이는 마음도 전적으로 이해한다. 이들은 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살아야만 하고, 그렇게 사람들의 십자포화를 받는 동료 여성 연예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봐 왔을 것이다. 감동적이었지만 동시에 뒷목이 서늘해진다.

걸그룹이라는 프레이밍

2차 경연에서 AOA가 선보인 <너나해> 무대가 큰 화제가 되면서, <퀸덤>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무대는 AOA가 한 번도 다른 무대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의 총집합이다. 각진 정장, 굽 낮은 정장 구두, 당당하고 냉철한 얼굴. 반대로 AOA가 보여줄 거라 으레 예상했던 것들은 보깅을 하는 남성 댄서들이 담당했다. 민소매, 짧은 바지, 하이힐, 섹시함을 어필하는 동작. 화려한 모습보다 절제된 모습을 취한 이 무대에서야 AOA는 주인공으로 온전히 빛났다. 무대를 마친 뒤 AOA가 벅찬 목소리로 말한다. “이거 우리가 진짜 예전부터 하고 싶던 거잖아.”

방영 이후, 수 많은 극찬 중 가장 대두됐던 내용은 ‘AOA가 노래를 이렇게 잘 하는지 그동안 몰랐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랬다. 그간 뒤태, 아찔, 야릇, 섹시, 숨막힘, S라인, 탄력 등 다양한 수식어에 가린 그의 목소리와 표정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어디 AOA만의 이야기일까. 출연진들은 무대를 마칠 때마다 이렇게 새로운 모습을 보일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거듭 말했다. 숲 속 요정 컨셉을 유지하던 오마이걸의 유아는 가장 하고 싶은 댄스 무대로 마피아 여성 두목 콘셉트를 꼽았고, 듀엣 미션을 앞둔 러블리즈 케이는 지금껏 걸그룹 노래 외에 다른 장르를 시도할 기회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신체는 성숙한 성인 여성의 몸이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함으로 무장한 채, 티 없이 맑고 발랄한 성격으로 모두에게 친절한 여자. 걸그룹들이 사회적으로 요구 받은 것들을 나열하고 나니, 그것이 없는 <퀸덤>의 세계가 무척 안정되고 편안해 보인다. 게다가 그들이 무대를 구성하고 기획하는 단계부터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야욕 넘치고 프로페셔널한 여자들이 보인다. (여자)아이들의 소연이 남자였다면 벌써 <쇼미더머니>의 프로듀서로 등장했을 거라는 말이나, 오마이걸이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놀랍다는 리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이민


제작진에게 전하는 한 마디

경쟁이 경쟁다울 수 있도록 정리하고, 기존 프레임을 거둬 욕망을 그대로 실현할 기회를 주었더니 걸그룹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무대를 앞 둔 동료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렸고, 처지와 환경을 이해했다.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우승을 향한 열망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무대를 주체적으로 꾸려 나가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퀸덤>에서 누가 이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토록 갈구하던 ‘다른 무언가’가 될 기회 앞에서 변화하는 여자 아이돌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단연 여기서 비롯한다.

<퀸덤>이 주목 받기 시작하자 <퀸덤>의 남자 버전인 <킹덤>을 제작하겠다는 제작진의 말을 전해 들었다. 이 말을 들으니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퀸덤>을 꼬박꼬박 챙겨보는지 정작 제작진만 모르는 것 같다. 단언컨대 시청자가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퀸덤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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